[ 최병일 기자 ]
경북 영주의 이미지는 극단적이다. 익숙하거나 생경한 도시다. 올곧은 선비정신이 영주의 전부라고 흔히들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영주에서 1박2일을 보내며 무엇이 익숙하고 무엇이 생경한지 살펴보자.
소수서원의 역사를 보다
선인들의 삶과 생각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경북 영주. 그 가운데서도 순흥면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던 동네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내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던 소수서원이 있다. 1543년 세워진 소수서원은 미국의 하버드보다 93년이나 앞섰으며, 배출한 인재는 4000여명에 이른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이미 없어진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는 뜻으로 본래 이름은 백운동서원이었다. 1542년 이곳 군수였던 주세붕은 우리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을 모시기 위해 숙수사 절터(지금의 소수서원 자리)에 그의 사묘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안향의 뜻을 기리고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은 1550년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주세붕의 후임 군수였던 퇴계 선생은 부임 후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명종은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일으키라는 뜻에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편액과 책,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했다. 이로써 최초의 국가공인 사립 교육기관이 탄생했다.
서원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수백그루가 숲길을 이룬다. 이리저리 가지를 틀며 수백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노송 군락이 마치 소수서원을 향해 경배하는 듯하다. 이는 유생들이 소나무처럼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렸다.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 부석사
영주 부석사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배흘림기둥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의 유작《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영향이 크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글자 그대로 ‘뜬 돌’을 뜻하는데 여기엔 의상을 사모했던 여인 ‘선묘’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선묘는 당나라에서 유학 중인 의상을 흠모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가에 귀의해 그를 도우리라 결심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왕명에 따라 지금의 부석사 터에 절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수백의 도적 떼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본 선묘는 사방 10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했다. 도적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물러났고, 의상은 뜻대로 이곳에 절을 세웠다.
그때 선묘가 변해서 떴던 돌이 지금 무량수전 왼쪽 뒤에 있는 돌무더기라고 한다. 바위에는 훗날 누가 새겼는지 ‘부석(浮石)’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빼어난 풍광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아니, 이왕이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좋겠다. 그 우아한 기둥에 몸을 슬쩍 기대고 시선을 멀리 보내면 첩첩이 파도치듯 뻗어 내린 소백산이 부석사 앞마당으로 안겨 들어온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운치가 있다. 그중 노을 지는 저녁을 최고로 친다.
시간의 다리를 건너다, 무섬마을
영주 시내에서 차로 30분쯤 달리면 무섬마을에 이른다. 행정구역상 명칭은 수도리(水島里). 말 그대로 ‘물 위에 뜬 섬’이다. 진짜 섬은 아니고, 강물이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돌아 나가는 형상이 마치 물 속의 섬 같아 ‘무섬’이요, ‘수도(水島)’다. 지금이야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가 두 개나 있지만, 30년 전까지만 해도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는 외나무다리가 유일했다. 그나마도 큰비가 오면 다리가 떠내려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이렇다 보니 마을사람들의 삶은 늘 신산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외나무다리를 건너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가 죽으면 이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고 했을까.
강물에 다리를 뻗치고 선 외나무다리는 밋밋한 생김새와 달리 건너는 맛이 제법 있다.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얼면 어는 대로 재밌다. 물살이 약간 느껴지는 한두 군데가 스릴 있다면, 나머지는 물 아래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감상하며 노래까지 흥얼거릴 만큼 여유롭다.
여행팁
자동차로 영주에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내린 다음 풍기 소재지에서 순흥 방향으로 931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소수서원이 나온다. ‘옛날순대’는 영주 고유의 옛날식 순대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두툼한 대창에 선지, 숙주, 파 등을 넣고 쪄낸 순대의 육질이 쫄깃하고 고소하다. 머릿고기, 내장 등을 함께 썰어넣은 국밥도 감칠맛 있다. 영주시내에 있다. 국밥 4000원, 순대 8000~1만원. (054)635-4149 서부냉면(054-636-2457)은 평양냉면을 잘하기로 소문난 집이다.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경북 영주의 이미지는 극단적이다. 익숙하거나 생경한 도시다. 올곧은 선비정신이 영주의 전부라고 흔히들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영주에서 1박2일을 보내며 무엇이 익숙하고 무엇이 생경한지 살펴보자.
소수서원의 역사를 보다
선인들의 삶과 생각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경북 영주. 그 가운데서도 순흥면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던 동네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내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던 소수서원이 있다. 1543년 세워진 소수서원은 미국의 하버드보다 93년이나 앞섰으며, 배출한 인재는 4000여명에 이른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이미 없어진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는 뜻으로 본래 이름은 백운동서원이었다. 1542년 이곳 군수였던 주세붕은 우리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을 모시기 위해 숙수사 절터(지금의 소수서원 자리)에 그의 사묘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안향의 뜻을 기리고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은 1550년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현판을 하사받으면서 쓰이기 시작했다. 주세붕의 후임 군수였던 퇴계 선생은 부임 후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명종은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일으키라는 뜻에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편액과 책,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했다. 이로써 최초의 국가공인 사립 교육기관이 탄생했다.
서원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수백그루가 숲길을 이룬다. 이리저리 가지를 틀며 수백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노송 군락이 마치 소수서원을 향해 경배하는 듯하다. 이는 유생들이 소나무처럼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렸다.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 부석사
영주 부석사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배흘림기둥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의 유작《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영향이 크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글자 그대로 ‘뜬 돌’을 뜻하는데 여기엔 의상을 사모했던 여인 ‘선묘’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선묘는 당나라에서 유학 중인 의상을 흠모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가에 귀의해 그를 도우리라 결심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왕명에 따라 지금의 부석사 터에 절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수백의 도적 떼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본 선묘는 사방 10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했다. 도적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물러났고, 의상은 뜻대로 이곳에 절을 세웠다.
그때 선묘가 변해서 떴던 돌이 지금 무량수전 왼쪽 뒤에 있는 돌무더기라고 한다. 바위에는 훗날 누가 새겼는지 ‘부석(浮石)’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빼어난 풍광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아니, 이왕이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좋겠다. 그 우아한 기둥에 몸을 슬쩍 기대고 시선을 멀리 보내면 첩첩이 파도치듯 뻗어 내린 소백산이 부석사 앞마당으로 안겨 들어온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운치가 있다. 그중 노을 지는 저녁을 최고로 친다.
시간의 다리를 건너다, 무섬마을
영주 시내에서 차로 30분쯤 달리면 무섬마을에 이른다. 행정구역상 명칭은 수도리(水島里). 말 그대로 ‘물 위에 뜬 섬’이다. 진짜 섬은 아니고, 강물이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돌아 나가는 형상이 마치 물 속의 섬 같아 ‘무섬’이요, ‘수도(水島)’다. 지금이야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가 두 개나 있지만, 30년 전까지만 해도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는 외나무다리가 유일했다. 그나마도 큰비가 오면 다리가 떠내려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이렇다 보니 마을사람들의 삶은 늘 신산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외나무다리를 건너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가 죽으면 이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고 했을까.
강물에 다리를 뻗치고 선 외나무다리는 밋밋한 생김새와 달리 건너는 맛이 제법 있다.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얼면 어는 대로 재밌다. 물살이 약간 느껴지는 한두 군데가 스릴 있다면, 나머지는 물 아래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감상하며 노래까지 흥얼거릴 만큼 여유롭다.
여행팁
자동차로 영주에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내린 다음 풍기 소재지에서 순흥 방향으로 931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소수서원이 나온다. ‘옛날순대’는 영주 고유의 옛날식 순대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두툼한 대창에 선지, 숙주, 파 등을 넣고 쪄낸 순대의 육질이 쫄깃하고 고소하다. 머릿고기, 내장 등을 함께 썰어넣은 국밥도 감칠맛 있다. 영주시내에 있다. 국밥 4000원, 순대 8000~1만원. (054)635-4149 서부냉면(054-636-2457)은 평양냉면을 잘하기로 소문난 집이다.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