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앞서 경기중학교를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한 뒤 경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합니다. 1학년 때 검정고시에 수석 합격해 그 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차석 입학한 뒤 19세이던 1959년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는 후에 미국국립과학재단 (NSF) 에너지정책 수석심의관,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 한국인최초 유엔(UN) 국제원자력기구 의장, 국제원자력한림원 회장을 지내는 등 세계적 권위의 ‘과학자’ ‘행정가’로 평가받습니다.
남플로리다대 물리학과 조교수 (1963~1966)이 후 경력은 이 같은 세계적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과정을 고스란히 설명합니다. 미국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 연구교수 (1964~1966) 미국 MIT대 핵공학과 연구교수 (1966~1967) 미국 뉴욕공과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 (1967~1971)
한국과학원 부원장 및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1971~1975) 미국 뉴욕공과대학 핵공학과 및 전기공학과 교수 (1975~1986) 한국과학재단 에너지정책 수석 심의관 (1979~1982) 한국전력기술 사장 (1982~1986) 국제원자력기구안전자문위원 (1984~1987)
아주대 에너지학과 석좌교수 (1987~2000) 한국과학재단 상근 이사장 (1988~1990) 국제원자력기구 이사 및 총회 의장 (1987~1989, 1989~1990) 12대 및 15대 과학기술처 장관 (1990, 1994~1996) 고등기술연구원장 (1992~1994,1998)
대한민국 원자력대사 (1992~1993, 1996~1997) 국제원자력한림원 회장 (1994~1998) 한국 사랑의집짓기 운동(HABITAT) 연합회 이사장 및 국제이사 (1995~현재)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1999~2001) 대구경북과학기술연구원 설립위원 (2004)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2004~2007) 명지대 총장 (2004~2007) 미국 조지메이슨대 초빙 석학교수 (2008~현재) 한국전력공사 고문 (2009~현재)입니다.
정근모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인재의 요람으로 불리는 ‘한국과학기술원 KAIST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는 정근모 박사가 미국 미시건주립대에서 공부할 때 만난 존 한나 (John A. Hannah) 총장과의 각별한 인연에서 비롯하고요.
존 한나 총장은 1969년 미국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장으로 부임한 뒤 정 박사에게 “한국을 도울 수 있는 교육 원조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정 박사는 이에 “국제 수준의 과학기술대학원이 필요하다”며 대학원 중심의 이공계 교육기관 구상을 담은 보고서를 미국 국제개발처 (USAID)에 제출했고요.
존 한나 국제개발처장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 KAIST 전신인 ‘KAIS’ 설립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제안하면서 설립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 설립과 1967년 과학기술처 출범에 따라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의 지속적인 공급이 절실하다는 인식에서 비롯했고요.
마침내 1971년 2월 16일 설립에 이르게 됐습니다. 정근모 박사는 10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해 당시 31세의 나이로 초대 부원장 겸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연구실 디자인에서 부터 교수진 확보, 미국으로 부터 600만달러 교육 차관 획득’ 등의 업무를 도맡아 처리합니다.
정근모 박사는 연구자로서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타이틀이 따릅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와 MIT에서 핵융합연구를 수행하고 미국 과학재단에서 에너지정책 분야의 수석심의관으로 활동한 정근모 박사는 1982년 7월 한국전력기술 사장에 취임합니다.
1984년 국내 실정에 맞고 안전성이 향상된 ‘한국 표준형 원전 (100만kW급 가압경수로형) 원자로의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고요. 이 표준형 원전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 (UAE)에 수출됐습니다.
KAIST 강성모 총장은 2월 21일 금요일 열리는 2014 KAIST 학위수여식에서 정근모 (75) 박사에게 ‘명예과학기술학박사학위’를 수여할 계획입니다.
한경닷컴 뉴스국 윤진식 편집위원 js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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