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기간보다는 실적을 기준 삼아야"
[ 오동혁/김희경 기자 ] ▶마켓인사이트 2월19일 오후 2시39분
#1 “초기기업 벤처펀드에서 투자를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 명의로 신청하세요.” 모바일 부품업체 A사 사장은 최근 정부 산하 모 기관에 운영자금 지원 문의를 했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회사가 설립된 지 3년10일 돼 초기기업 벤처펀드 투자기준(설립 3년 미만)을 넘었으니 지원을 받으려면 같은 사업 아이템으로 다른 사람 명의의 회사를 다시 설립하라는 것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도와주겠다는 말인데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고 털어놨다.
#2 중소 방송제작사 대표인 B씨는 정부의 ‘벤처기업인증’을 받으면 각종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술보증기금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B씨는 “창업 3년을 넘은 회사는 벤처인증을 받았더라도 세금 혜택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새 법인 설립을 고민 중이다.
정부가 초기 벤처기업 지원 기준으로 못 박은 ‘창업 3년 미만’이란 틀이 3년 이상 어렵게 생존해 온 벤처기업들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기술력이 있어도 3년이란 좁은 틀을 조금만 벗어나면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업계에선 ‘설립 기간’보다는 ‘실적’ 중심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3년 이상 버티면 ‘역차별’
정부가 중점 육성하고 있는 초기기업 지원 대상은 모두 ‘창업 3년 미만 법인’으로 한정돼 있다. 중소기업 창업지원법에 초기기업의 범위가 그렇게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창업초기펀드(46개ㆍ6130억원), 청년창업펀드(5개ㆍ1050억원), 엔젤매칭펀드(11개ㆍ1400억원) 등 정부 주도로 결성된 8580억원의 벤처펀드 자금이 의무투자비율 등 때문에 설립 3년 이상 기업에는 사실상 투자될 수 없는 상황이다.
세제 혜택에서도 창업 3년 이상 기업은 철저히 소외된다. 법인세(4년간) 소득세(4년간) 재산세(5년간) 50% 감면, 취득세(4년간) 면제 등과 같은 세제 혜택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벤처인증 자격도 무용지물이다.
한 벤처기업 대표는 “개인 빚을 내고 집까지 팔아 4년차에 성과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런 노력이 간발의 차로 인정받지 못해 서글프다”고 토로했다.
벤처투자 회사들도 기업들의 상황이 딱하지만 도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한 투자회사 관계자는 “성장사다리펀드와 같이 4~7년차 기업에 중점 투자하는 펀드가 있긴 하지만, 연매출 50억원을 넘는 기업만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며 “매출이 이에 못 미치는 4년차 정도의 ‘중·고참’ 벤처들의 현실과 괴리가 많다”고 말했다.
◆새 법인을 세우는 ‘변칙’도
일부 벤처회사는 새 법인을 차리는 ‘변칙’을 쓰기도 한다. 한 소프트웨어 개발사는 우여곡절 끝에 4년 만에 제품을 개발했는데 투자 유치가 어렵게 되자 새 법인을 설립해 주력사업부를 이전했다.
업계에선 미국 등 선진국처럼 ‘실적’을 초기기업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연매출이 일정 수준 이하이거나, 소규모 자본금에 영업손실이 발생하는 업체 등은 예외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초기기업 기준은 창업지원법을 수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며 “실질적인 초기기업으로 판단되는 곳을 선별해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오동혁/김희경 기자 otto8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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