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넓은 부산항을 우리 넷이 다 관리한다 아입니까.”1982년 부산. 부산항 세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경주 최씨 충렬공파 35대손’ 익현(최민식 분)은 시계 밀수업자에게 이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돈을 요구한다. 그는 전형적인 비리 공무원이다. 밀수를 눈감아 주는 대신 밀수품과 뇌물을 챙긴다. 익현뿐 아니라 영화 속 세관 공무원들은 일상적으로 뇌물을 받는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서로 “적당히 좀 받아먹어라”라고 농을 건넬 뿐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중앙정부의 대대적 감사가 뇌물 공무원들을 코너로 몰아넣는다. 비리가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적발되자 그들은 희생양 한 명을 내세워 사태를 덮으려 한다. 결국 익현이 부양가족이 적다는 이유로 대상자로 뽑힌다. 익현은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 영화 속 동료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부양가족을 두고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비리 공무원이었던 익현이 건달세계에 들어가 권력과 폭력을 좇아 타락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인 vs 대리인
세관에서 쫓겨난 익현은 밀수된 필로폰을 부산 최대 조직의 젊은 보스 최형배(하정우 분)에게 팔아넘기면서 건달세계에 들어간다. 형배는 충렬공파 기준으로 익현의 손자뻘이었다. 영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익현이 형배와 가부장적 네트워크로 엮이는 순간이었다. 익현은 형배와 손을 잡자마자 타고난 처세술과 뇌물로 구축한 인맥으로 감옥에 들어갈 뻔한 형배를 구한다. 익현의 능력을 높이 산 형배는 사업(?)을 확장하는 일을 익현에게 맡긴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주인-대리인 관계이다. 폭력조직의 보스, 다시 말해 조직의 주인은 형배, 보스의 지시를 받아 조직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익현은 대리인의 위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익현은 끊임없이 형배의 자리를 넘본다. 조직 내 자신의 역할을 과신한 나머지, 자신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형배의 부하들을 때리고 행패를 부린다. 집안의 인연과 폭력-인맥의 교환으로 구축된 두 사람의 공고한 협력관계는 본분(?)을 망각한 익현(대리인)의 일탈로 파국을 맞이한다. 익현은 형배가 자신에게 권력을 나눠줄 의사가 전혀 없음을 확인한 뒤 형배의 라이벌 조직과 손잡는 승부수를 던진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익현은 형배 일당에게 끌려가 죽을 만큼 얻어맞은 뒤 굴욕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형배(주인) 입장에서 익현의 도전은 이른바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다. 국가(주인)와 공무원(대리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익현은 타락한 대리인이다. 국가가 위임한 징수권한을 범죄적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악용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리인의 존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주인 홀로 모든 것을 챙기기엔 물리적인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전문성과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대리인인 국회의원을 뽑아 정치를 맡기는 대의민주주의나 대주주가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경영을 맡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리인의 타락
문제는 익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대리인이 항상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은밀하게 더 챙기거나 심지어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판단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도 마찬가지다. 전문경영인은 주주에 의해 고용된 사람이지만 그의 개인적 이해관계와 대주주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주주들이 경영자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은 언제든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틈새를 가질 수 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매출이나 시장점유율을 속일 수도 있고 회계를 조작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도덕적 해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단지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다는 뜻에서가 아니다. 대리인이 주인과의 계약이나 약속을 통해 명시적·암묵적 합의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경영계에서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 가운데 주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히는 경우는 분식회계다. 기업 속이 철저하게 곪아가는데도 주인(주주)들의 눈을 속이고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최악의 분식회계로 꼽히는 사건은 2001년의 엔론 파산(☞대리인 일탈의 경제적 사례) 사태였다. 엔론이 파산 직전까지 38억달러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난 이 사건은 미국 전체 기업의 신인도를 끌어내리면서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이 사건으로 1913년 설립된 다국적 컨설팅 전문회사 아서앤더슨은 2002년 71억8500만달러라는 역사상 최고의 합의금을 물며 몰락했다. 엔론의 전 사장 제프 스킬링은 징역 24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타격을 입은 것은 엔론의 주주들이었다. 보유 증권이 졸지에 휴지나 다름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카메라·광학기업인 일본의 올림푸스(☞대리인 일탈의 경제적 사례) 역시 2011년 15억달러 상당의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본 기업들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누가 승리자인가
대리인이 나쁜 의도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보나 지식 등이 부족한 경우다. 자유주의 철학의 기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국민의 대리인인 정치인은 실제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 ☞하이에크가 지적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며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으로 부르는 국회의 전횡도 따지고 보면 대리인의 실패다. 나라 전체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지역구 사업예산 확대를 고집하는 양태나 선거전략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공약을 남발하는 경우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조직에서 처절하게 밀려난 익현은 1990년 정부가 선언한 ‘범죄와의 전쟁’으로 반격의 기회를 맞이한다. 조직폭력 두목으로 구속될 위기에 처한 익현은 검사와 모종의 거래를 한다. 진짜 보스인 형배를 넘길 테니 자신은 놓아 달라는 것. 해외로 도피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익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형배는 결국 검찰에 체포되고 익현은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온다. “결국 내가 이겼다”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검사가 된 익현의 아들 최주한(박병은 분)이 아들 돌잔치를 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성한 아들과 많은 손님에게 축하인사를 받는 익현은 자신의 말대로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에겐 생존에 성공한 타락한 대리인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익현의 아들을 검사로 만든 연출자의 의도는 향후 익현 같은 인물이 더 크고 강력한 보호막 속에서 암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범죄와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강영연 한국경제신문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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