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4) 선사시대: 농업의 시작

입력 2014-03-07 18:36  


문자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인류는 문자의 발명으로 두뇌 외부에 고성능 기억장치를 가지게 되어 낮은 비용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시대는 이러한 문자 기록의 이익을 전혀 누릴 수 없는 시대이며, 따라서 모든 것이 느리다.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인류학자에게는 선사시대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구석기시대가 중요하겠지만, 경제사의 관점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농업 시작이 더 중요하다.

사람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 조건인 식량 획득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단순하고 규모가 작았던 사회 조직이 대규모의 복잡하고 위계적인 조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농업의 시작은 ‘신석기혁명’이라고 불리며, 저명한 사회생물학자인 E 윌슨도 “모든 진보를 압도하는 가장 거대한 진보”이며 “훗날의 군장사회와 대군장사회, 이윽고 국가와 제국까지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단언하였다(『지구의 정복자』 2012).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인 농업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조, 기장, 피와 같은 잡곡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3000년부터였지만, 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기원전 1000년부터 시작되는 청동기시대였다.

벼농사가 시작된 것도 기원전 1000년부터라고 추정되고 있다. 초기의 농업은 돌도끼로 벌목을 한 다음에 불을 붙여 경지를 만들고 씨앗을 심어 수확한 후에 15~20년 이상을 묵히는 방식이었다(장기 휴경). 청동기시대에도 농기구는 청동기가 아닌 돌과 나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는데, 청동기를 이용하여 쓰기 좋은 목제 농기구를 만들었으며(그림 참조), 휴경 기간도 5~10년으로 줄어들어 토지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중기 휴경). 이러한 휴경 기간의 단축은 농업 시작 이후 인구가 증가함으로써 토지가 희소해졌기 때문인데, 인구 압력으로 인해 농업기술이 진보한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던 주민들은 하천이나 해안 주변에 거주하면서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나 식물의 열매를 채취하였으며, 일부 원시적인 농경을 시작하였다. 반면에 농업이 본격화되었던 청동기시대의 주민은 내륙에 위치한 구릉지대에 거주하면서 민무늬 토기(무문토기)를 이용한 사람들이었다. 고고학적 조사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자취를 감추고 민무늬 토기로 대체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농사를 지었던 민무늬 토기인이 수렵채집 단계의 빗살무늬 토기인을 도태시키거나 흡수해 간 것으로 추측된다.

왜 이러한 식량 획득 기술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일까? 적은 노동으로 건강에 유익하고 높은 칼로리의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농업이 수렵·채집보다 우월한 기술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 같지는 않다. 수렵채집인이 농경인에 비하여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는 증거가 많기 때문이다.

수렵생활은 공유지의 비극 야기

수렵·채집 단계에서는 몇 가족이 무리를 이루어 식량자원을 따라서 이동하면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식량자원에 대한 배타적인 재산권이 생겨나기는 어렵다. 이러한 공동 소유의 재산권 제도 하에서는 인구가 늘어나서 자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게 될 경우에 자원이 고갈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될 뿐 나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구 압력에 직면한 수렵·채집 사회가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생존 전략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였을 선사시대의 군사적 경쟁(전쟁)에서 인구가 많은 집단에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렵·채집 사회도 느리지만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인데, 공동 소유의 재산권 제도로 인하여 식량자원이 고갈되어 가면 동일한 노동을 투입하여 얻을 수 있는 식량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전에는 조금만 노력해도 큰 동물을 잡고 먹기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배를 채우기도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이 맞는다면, 농업은 항상 우월한 기술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수렵·채집의 생산성이 하락함으로써 농업이 유리한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기술의 발명이 그대로 경제적 의미를 지닌 혁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수렵·채집 사회에 인접하여 농업기술을 가진 새로운 집단이 이주하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인구 증가로 인해서 자원이 부족하게 되면, 두 사회(집단) 간의 군사적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욱이 수렵·채집 사회는 항상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없는 어린아이를 많이 부양할 수 없었지만, 농업사회는 정착생활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또한 농업이 시작되면 작물을 재배한 토지와 수확한 식량을 외부의 약탈로부터 지켜야 하기 때문에 외부인의 접근을 배제하는 ‘배타적 (공동) 소유’의 재산권 제도가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공동 소유의 수렵·채집 단계와는 달리 경지 개간과 같은 투자와 기술진보가 촉진됨으로써 생산성이 높아져 잉여 식량의 축적도 가능하게 된다.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회적 분업의 확대로 전문화가 진전되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지게 된다. 군사기술과 무기제작에 대한 전문화가 이루어짐으로써 군사력도 강화될 것이다.

농업 시작되며 재산권제도 발전

이러한 농업사회도 결국에는 ‘맬서스 함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구 증가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주변의 농업사회나 수렵·채집 사회의 자원(토지와 식량)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데 이는 결코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전쟁이 많았음은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인 충남 부여 송국리의 취락유적은 주변에 하천이 흐르는 높이 30미터 전후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취락과는 달리 여러 채의 움집을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농기구 외에 청동이나 돌로 된 칼, 돌도끼, 화살 등의 무기가 함께 출토되고 있으며 화재로 불 탄 흔적도 발견되어 전쟁이 빈번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농업의 시작은 농업기술의 전파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으며 인구 증가에 의한 자원의 고갈, 그리고 농업사회와 수렵·채집 사회의 군사적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더욱이 이러한 군사적 경쟁을 통해서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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