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녀의 벽 허물어진 항공업계…여성 파일럿 발자취 남길 것"
[ 최유리 기자 ]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무서워한다고 했다. 20대 후반까지 해외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 그다. 그나마 가장 멀리 가본 제주도에 여권을 가져가야 하냐고 물었을 정도로 대담한 도전을 멀리했다.
누가 봐도 비행기 조종사와 거리가 먼 성향의 그는 이달 저비용항공사(LCC) 진에어의 첫 여성 부기장이 됐다. 7개 국적항공사를 포함해 20여 명 남짓한 국내 여성 조종사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 특히 다른 LCC보다 3~4배 많은 운항 경력(비행 1000시간)을 요구하는 진에어에서 첫 여조종사가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던 소녀에서 진에어 1호 여조종사가 되기까지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지난 12일 젊음의 거리 서울 홍대에서 최윤경 부기장(29·사진)의 도전기를 들어봤다.
"어린 시절부터 쭉 강릉 비행장 바로 옆에 살았습니다. 놀다보면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금새 주변에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졌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종사를 막연히 동경하고 꿈꾸게 됐습니다."
조종사로 진로를 정한 뒤 한서대 항공운항과에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40여 명의 동기 중 여학생은 최 부기장이 유일했다. 겁이 많은 탓에 선택한 길이었다. 급격하게 고도를 변경하는 전투기 조종과 무중력 훈련만큼은 피하고 싶었다고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그러나 그 길도 평탄치는 않았다. 특히 남학생들과 경쟁에서 뒤쳐질 때 들었던 좌절감이 발목을 잡았다. 조종 실습 당시 기계에 능숙하고 방향 감각이 뛰어난 남자 동기들을 따라잡기 어려웠다고 최 부기장은 회상했다.
"단독 비행을 하려면 이착륙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동기들보다 더딘 편이었습니다. 남자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구체적인 조작법이 아니라 '이만큼만 틀어'라고 애매하게 알려주더군요. 감으로 하는 그들만의 표현법이겠죠. 이러다 계속 뒤처지는 건 아닌지 조바심도 났습니다. 그들보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죠."
4년재 대학을 졸업하며 최 부기장은 200시간의 비행 시간을 쌓았다. 250~1000시간을 요구하는 국내 항공사 입사 요건을 갖추기 위해 그는 조종석 자리를 갈아탔다. 훈련받던 학생에서 교관으로 변신한 것. 한서대 비행교육원과 조종사 양성 기관인 울진비행장서 800여 시간의 비행 경험을 다졌다.
"훈련받던 왼쪽 조종석에서 가르치는 오른쪽 조종석으로 옮기면 모든 조작 동작이 바뀝니다. 균형감도 다시 익혀야 해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죠. 그래도 교관은 돈을 받으면서 훈련 시간을 쌓을 수 있는 길이예요. 기관에서 교육을 받으면 미국은 연간 1억원, 한국은 그 이상의 비용이 들거든요."
운항 경력 1000시간을 채운 최 부기장은 진에어에 도전장을 냈다. 서류 전형과 신체 검사, 인성 검사, 필기 시험, 비행 시뮬레이터 시험, 마지막 최종 면접까지 6단계를 거쳤다. 합격의 기쁨을 맛 본 그는 진에어 최초의 여성 운항 승무원이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긴 훈련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꼽았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만큼 무거운 책임감과 큰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 제주도 운항훈련원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만석으로 찬 기내를 보고 왈칵 눈물을 쏟기도 했던 그다.
진에어에선 최초의 타이틀을 달았지만 과거보다 여성 조종사에 대한 벽이 낮아졌다고 최 부기장은 평가했다. 체력만 보강하면 남성보다 섬세한 조종 기술을 경쟁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대형항공사뿐 아니라 LCC가 공격적으로 여객기를 확대하면서 조종사 수요가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막 창공으로 날아오른 최 부기장의 향후 행보는 모두 기록이 될 전망이다. 진에어의 첫 여성 부기장에서 기장으로, 첫 정년 퇴임 기장으로 남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진에어에 입사해 훈련 과정을 거치고 있는 여후배가 있어요. 그 후배가 고참 부기장이 될 즈음엔 제가 기장이 돼있을 겁니다. 여성 기장과 부기장이 나란히 앉아 비행하는 날이 오는거죠. 상상만해도 멋진 풍경아닌가요."
한경닷컴 최유리 기자 nowhe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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