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인생 꿈꾸다
英공업도시 셰필드 철강회사 손자
가업승계·대학진학 대신 은행 인턴
고교 은사 조언에 컴퓨터공학 전공
실리콘밸리서 쓴맛
소프트웨어컨설팅 '인세보' 창업…닷컴 버블에 휘청 '눈물의 매각'
창업의 고통 즐긴다
영국의 코스닥 AIM에 상장…알짜 자본으로 주가 10배 뛰어
[ 남윤선 기자 ]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포도밭이 딸린 수십억원짜리 저택. 기업가치 4억9100만달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이 같은 스펙을 지닌 행운의 주인공은 지독한 영국 북부식 사투리를 쓰는 40대 중반의 경영인이다. 기업용 원격 통제 및 데이터 실시간 저장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웬디스코의 데이비드 리처드 CEO 얘기다. 리처드는 실리콘밸리에서만 25년을 근무했다. 1990년대 말 ‘닷컴 거품’의 붕괴를 거치고도 살아남았다. 덕분에 그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진짜 성공’이 뭔지 아는 진정한 구루(현자)로 꼽힌다.
성공에 목말랐던 시골 청년
리처드는 영국 북부 공업도시 셰필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셰필드 철강회사’의 사장이었다. 가업으로 철강업을 이어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쿨’한 삶을 꿈꿨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났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인턴으로 입사했다. 쿨한 은행가의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고졸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돼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리처드의 고교 선생님이 그의 운명을 바꿀 한마디를 했다. “앞으로는 컴퓨터의 시대가 온다.” 당시가 1980년대 후반. 컴퓨터가 뭔지도 몰랐지만 여하튼 ‘느낌’이 왔다. 그 길로 대학에 입학해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이곳에 있는 놈들은 여자도 안 만나고 설인처럼 수염을 기르고 다녔습니다. 뭔가 싶었죠.” 하지만 곧 선생님의 조언은 탁월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92년 대학 졸업 뒤 드루이드라는 소프트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그에게 자동차와 스톡옵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그는 스톡옵션을 골랐다. 드루이드는 이듬해 상장했다. 리처드는 100만파운드가 넘는 돈을 쥐었다. 그는 벤츠C클래스를 샀다. “당시에는 고급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인터넷 사업은 점점 빠르게 커갔다. 리처드의 시선은 곧 대서양 건너 실리콘밸리로 이어졌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고 사무실에 개를 풀어놓는, 돈이 넘쳐나는 실리콘밸리의 모습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당시 결혼한 아내와 함께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세보’라는 소프트웨어 컨설팅업체를 세웠다. 모든 게 잘 되던 때였다.
거품을 통해 진짜 경영을 배우다
당시 실리콘밸리에는 돈이 흔했다. 벤처캐피털(VC)들은 어설픈 회사에도 쉽게 돈을 빌려줬다. 그 역시 VC에서 쉽게 수백만달러를 유치해 거부가 되는 삶을 꿈꿨다. “당시에 데드닷컴(dead.com)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웹사이트 문구는 ‘당신이 평생 한번도 방문하지 않을 사이트’였죠. 이런 회사도 2000만달러 투자를 받더군요.” 당연히 리처드도 VC의 돈을 따오는 데 집중했다.
그는 “VC 실사에서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로고 디자인이나 카펫 따위에 신경을 쓰고 살았다”며 “소비자들은 관심 밖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2000만달러 정도의 투자를 받았다. 하지만 VC들은 그들의 경영기법을 강제로 인세보에 심으려고 했다. 초기 창업기업의 순발력이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1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IT 거품이 터져버렸다. 회사의 기업 가치도 폭락했다. 결국 그간 모은 돈을 모두 날렸다. 리처드는 다시는 VC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인세보를 헐값에 팔고 ‘리브라도’라는 이름의 회사를 세웠다. 스페인어로 ‘자유로운 남자’란 뜻이다. 다시는 VC에 경영을 간섭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진짜 제품 가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킬러 집단 같았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엄청 열심히 일하고 물건을 팔았죠.” 그는 결국 1000만달러에 회사를 팔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나는 마조히스트”
새 사업을 구상하던 차 실리콘밸리의 유명 프로그래머인 예투루 아라드를 만났다. 그는 ‘빅데이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리고 기업들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관리하기 위해 원거리에서 조작 및 저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처드의 감이 또 한 번 발동했다. “나는 천재를 한눈에 알아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빅데이터는 혁신적인 개념이었죠.” 그렇게 차린 회사가 웬디스코(WANdisco)다. 회사의 제품인 ‘원거리 네트워크 분배 컴퓨팅(Wide Area Network distributed computing)’의 약자다. 여러 곳에서 직원들이 동시에 접속해 작업을 함께 할 수 있게 하고,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중앙 서버에 저장해 주는 서비스는 처음이었다. 곧 경쟁사들도 등장했지만 웬디스코의 데이터 처리 속도가 훨씬 빨랐다.
기업 고객이 줄을 이었다. 휴렛팩커드, 록히드마틴 등 대기업도 웬디스코의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2012년 여러 투자은행이 뉴욕증시에 상장을 종용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의 거품을 경험한 리처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미국 증시 대신 영국의 코스닥 같은 AIM(Alternative Investment Market)에 상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미국 증시에는 수많은 IT 기업이 있어 관심을 받기 어렵지만 영국에선 오히려 알짜 자본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처음엔 2600만파운드라는 비교적 작은 금액만 모았지만, 기업가치는 점점 커졌다. 지금은 초기 상장 때보다 주가가 10배 넘게 올랐다. 2012년 11월엔 알토스토라는 기업을 매입해 본격적인 빅데이터 관리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야후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등 쟁쟁한 IT 기업들이 모두 웬디스코의 고객이다.
대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여전히 초기 창업자처럼 일한다. 웬디스코의 영업 사무실은 실리콘밸리에 있지만 본사는 고향인 셰필드에 두고 있다. 그는 “셰필드는 인건비가 미국보다 훨씬 싸지만 박사학위자는 차고 넘친다”고 말했다. 그는 셰필드 사무실에 5000파운드(약 885만원)짜리 커피 머신을 둔다.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전담하는 직원도 둔다. 직원들이 원한다면 무제한 유급휴가도 준다.
리처드는 “우리 회사의 휴가 사용률은 IT 업계 최저 수준”이라며 “신뢰를 주면 직원들은 알아서 일한다”고 강조했다.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여전히 그는 새로운 시도를 좋아한다. “약간 마조히스트(고통을 즐기는 사람) 같지만, 나는 초기 창업 직후에 겪는 고통을 좋아합니다. 조그만 계약을 딴 뒤 맥주 마시러 가는 기분은 최고죠.”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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