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사] 분업·기술 발전·여가생활…이 모두를 가능케한 화폐의 힘

입력 2014-03-14 17:50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5) 화폐의 출현과 화폐경제의 발전

교환 활동으로 생성된 화폐, 인류의 삶 송두리째 뒤바꿔
판매성 가진 금과 은이 전세계에서 화폐로 통용
자생적으로 생긴 산물이기에 통화정책 등 개입은 신중해야




돈, 즉 화폐가 없다면 인간은 행복할까. 문학가, 철학자, 종교가, 예술가들 중 일부는 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사회 악의 근원이 돈이라는 생각을 그들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돈(화폐)이 없으면 인간은 원시석기시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물질적·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게 뻔하다. 역설적이게도 일부 돈을 터부시하는 문학가, 철학자, 종교가, 예술가들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세계와 인간의 삶을 바꿔 놓은 가장 큰 사건은 돈의 출현이다. 우리는 지금 우유를 마시기 위해 직접 젖소를 기르지 않는다. 밥을 먹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 신발을 직접 만들어 신지 않고 옷을 직접 만들어 입지도 않는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우유, 쌀, 신발, 의복 등을 돈으로 구입하고 있다. 돈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제공한 재화와 서비스로부터 얻어진다. 사람들이 일을 나눠 하고 협동하며 살아가도록 만든 게 바로 돈이다.

화폐는 분업을 촉진시켜 사람들이 특정한 일에 전문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폐가 없는 사회에서는 전문직업인이 존재하기 어렵다. 이것은 직접교환을 하는 물물교환 경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직접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쌍방의 욕구가 일치해야 한다. 즉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원해야 교환이 이뤄진다.

따라서 이런 세계에서 특정 직업에 특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빵을 얻으려는 교사가 있다고 하자. 빵을 만들어 파는 집에 취학연령 아이가 없다면 그 교사는 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특정 직업에 특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급자족하게 된다. 각자 농사 짓고, 옷을 만들고, 스스로 충치를 뽑는 삶을 택한다.

화폐의 등장은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화폐를 통해 거래가 이뤄지는 간접교환 경제에서는 궁극적인 거래자들의 욕망의 쌍방 일치가 필요치 않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원하지 않더라도 화폐를 가지고 가서 구입하면 된다. 거래상의 불편은 사라지고 거래를 위한 소요 시간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시간을 자신이 가장 잘하는 곳에 사용해 생산을 늘리고 여가와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폐경제는 더욱 발전해 갔고, 체력적으로 동물보다 연약한 인간을 지상의 주인이며 놀라운 기술의 창조자로 만들었다.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은 화폐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화폐가 정부의 창조물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특정 물품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함에 따라 화폐에 대한 수요가 발생했다고 한다. 정부가 정한 물품을 사용하면 정부에 대한 의무를 쉽게 이행할 수 있기 때문에 널리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정부가 요구한 물품 중 금, 은과 같은 것은 전 세계에 걸쳐 화폐로서 사용된 반면 가축 등과 같은 것은 화폐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물품이 다른 물품보다 화폐로서 더 나은 형태인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 사람이 카를 멩거다. 멩거는 아무 물품이나 교환의 매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잘 팔릴 수 있는 특성’, 즉 ‘판매성(salability)’을 가진 물품이 화폐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어떤 물품이 판매성을 갖기 위해서는 한 단위가 일정해야 하는 ‘동질성(homogeneity)’, 손상되지 않고 작게 분할될 수 있는 ‘분할성(divisibility)’, 그리고 보관하는 데 비용이 적게 드는 ‘저(低)저장비용(low storage cost)’의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금과 은이 이런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화폐로서 오랫동안 사용된 것이지 정부의 지정 때문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화폐는 특정인이 발명한 것이 아니고 오랜 옛날부터 인류의 교환 활동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돼 발전해온 것이다. 화폐는 ‘인간행동의 산물이지만 인간 디자인의 산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화폐는 하이에크가 말하는 자생적 질서의 전형적 예인 것이다.

화폐가 본디 정부의 영역이 아니고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생성·진화했다는 사실은 정부정책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화폐가 정부에 의해 창출된 것이라면 화폐제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면 화폐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화폐가치를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정부가 화폐제도에 개입한 이후 화폐변조가 지속적으로 이뤄졌으며 시장이 교란되고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1930년대 대공황을 비롯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1990년대 말 동아시아의 경제위기,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정부가 화폐를 잘못 다룬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정부가 화폐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제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안재욱 < 경희대학교 서울부총장·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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