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시장 개방과 WTO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 장관은 3일 “9월까지 국제무역기구(WTO)에 쌀 시장 개방 여부를 통보해야 한다”며 “6월까지 정부 입장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더 이상 의무 수입량을 늘려선 안 된다는 데 야당과 농민단체도 동의하고 있다”며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의무 수입량을 늘리지 않는 방안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쌀 시장 개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을 에둘러 밝힌 것이다. - 3월4일 한국경제신문
20년 개방 유예기간 끝나
쌀 국내 시장을 전면 개방할 것인지 아니면 의무 수입량을 더 늘릴 것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다. 정부는 의무 수입량을 더 늘리면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것보다 피해가 크므로 이번에 전면 개방하는 게 낫다는 입장인 반면 일부 농민단체 등은 전면 개방은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지금 쌀 시장 전면 개방이 이슈로 부상했을까? 한국은 올해 20년간의 쌀 시장 개방 유예 기간이 끝난다. 이에 따라 9월까지 세계무역기구(WTO)에 쌀 시장을 내년부터 개방할 것인지 여부를 통보해야 한다.
쌀을 의무 수입한 건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로 모든 상품시장을 개방할 의무를 지게 됐으나 쌀의 특수성을 고려해 국내 소비량의 4%를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대신 시장 개방을 2004년까지 미루기로 합의했다. UR은 당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주도로 진행된 세계적인 시장개방 협상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쌀 의무 수입량은 매년 늘어 2004년 20만5000t에 달했다.
정부는 2004년 다시 협상을 벌여 의무 수입량을 매년 2만t씩 늘리는 대신 2014년까지 관세화를 재차 미루기로(유예키로) 합의했다. 이로써 쌀 의무 수입량은 올해 40만8700t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국내 쌀 생산량의 7.97%에 달한다. 쌀 관세화(關稅化)란 쌀에 관세를 매기는 방법으로 수입을 개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관세화 유예는 수입 자유화를 미룬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쌀 수입 개방을 미루면서 지난 20년간 쌀 의무 수입에 쏟아부은 비용은 3조원, 남는 쌀 보관비도 해마다 수백억원에 달했다. 게다가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쌀 소비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국민 1인당 쌀 소비는 1995년 106.5㎏에서 올해 68.5㎏으로 감소했다. 이처럼 소비는 줄어드는 데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쌀은 늘어나고 여기에 국내에서 생산한 쌀을 더한 쌀 공급은 국내 수요보다 훨씬 많아져 쌀이 남아돌게 됐다. 한국의 쌀 생산은 매년 적을 때는 600만t, 풍년일 때는 700만t이 넘는다. 쌀이 남아도는데도 정부는 의무 수입량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외국에서 사왔다.
필리핀의 사례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피해가 더 큰 의무 수입량 확대보다는 차라리 수입 전면 개방이 낫다는 입장이다. 송주호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필리핀의 경우 관세화를 다시 유예화하는 대신 의무 수입 물량을 지금보다 2.3배 늘려주는 방식으로 WTO와 협상 중”이라며 “한국도 만일 관세화를 안 하고 유예를 다시 해야 한다면 더 피해가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쌀 수입을 자유화할 경우 핵심은 얼마나 세금(관세)을 매길 것인가인데 300~500%의 관세율을 적용하면 수입 쌀 가격이 국산 쌀 가격보다 높아져 쌀 수입 물량이 별로 많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국산 쌀 가격은 한 가마니(80㎏)가 17만4000원 선이다. 국제 쌀 가격은 가마니당 6만원 선인데 여기에 200%의 관세를 물리면 가마당 18만원 선에 달한다.
이에 대해 일부 농민 단체는 부정적이다.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관세화가 돼 가지고 처음 400%의 관세를 매기는 것으로 시작했다 해도 다른 나라의 압력으로 곧 관세율이 낮아지고 식량주권에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관세화를 또 미루면 의무 수입 물량을 늘려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농민단체들은 “쌀 시장 개방을 미루면서 의무 수입도 늘리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WTO 규정상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세계가 대한민국만 봐줄리 없기 때문이다. WTO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로선 그만큼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 쌀 수입을 자유화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 정도다. 필리핀은 2012년 6월 개방 유예 기간이 끝난 뒤 이를 연장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필리핀은 쌀 개방을 5년 더 늦추는 대신 의무 수입 물량을 35만t에서 80만5000t으로 2.3배나 늘리겠다고 했는데도 WTO 회원국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협상 참가국들은 육류(肉類) 관세 인하와 검역 완화 같은 다른 상품에서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관세화(쌀 시장 전면 개방) 대신에 필리핀처럼 의무 수입 물량을 2.3배 늘린다면 작년 쌀 생산량의 22%나 되는 94만t을 무조건 수입해야 한다. 이렇게 수입된 쌀은 남아돌아 창고에 쌓아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쌀 시장을 여는 대신 300~500%의 높은 관세를 매기면 의무 수입 물량 외에 수입 쌀이 더 들어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한국과 달리 높은 관세율을 붙여 쌀 시장 개방을 선택한 일본(1999년)이나 대만(2003년)의 경우 피해가 오히려 미미했다. 대만은 의무 수입물량 이외에 추가로 늘어난 쌀 수입량이 연간 500t 정도에 그쳤다.
식량안보도 감안해야
정부는 각계 의견을 모아 6월까지 쌀 관세화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쌀 시장 개방을 유예시킨) 20년을 돌이켜보면 10년 전에만 개방했어도 의무 수입량 20만t을 덤터기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때 “국내 포도 재배 농가가 다 망할 것”이라고 했지만 영동 지역 포도 농가 등의 소득은 오히려 늘었다. 쌀 시장 개방이 곧 농업의 파탄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란 얘기다. 더구나 출산율 저하와 급속한 노령화로 인해 농사를 지을 만한 노동력도 부족한 실정이다. 1997년 450만명에 달했던 농가 인구는 2012년 267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문제는 쌀 수입을 전면 자유화했을 때 주곡의 자급률이다. 쌀 자급률은 2010년 104%에서 2013년 86%대로 떨어졌다. 다른 식량자원을 포함한 전체 식량 자급률은 44.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다른 곡물은 모르더라도 주곡조차 자급할 수 없다면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조일현 경희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전 국회의원)는 “정부가 식량안보 차원에서 주곡의 생산목표를 설정하고 WTO 규정을 크게 위반하지 않는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농업과 농민을 적극 지원해 생산기반을 보호·육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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