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봉구 기자 ] “한국 대학들이 해외 대학평가기관의 ‘봉’이라서 그렇습니다. 평가 순위에 워낙 신경을 많이 쓰니까. 한 마디로 ‘장사’가 되니까 한국 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거죠.”
한 대학평가 담당자가 17일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THE(Times Higher Education) 필 배티 편집장의 방한을 두고 한 말이다.
THE는 이날 오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데 이어 오후엔 포스코센터에서 국내 대학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포럼을 개최했다.
어젠다는 단순했다. ‘어떻게 하면 대학랭킹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가 이날의 주제였다.
해외 대학평가기관이 국내 대학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 THE는 매년 세계대학평가 순위를 매겨 발표한다. 영국의 또 다른 평가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발표하는 세계대학랭킹과 더불어 국내 대학들의 관심이 높은 해외 대학평가다. 서울대부터 다른 평가는 제쳐두고 THE와 QS의 세계대학평가에만 대응하고 있다.
THE 대학평가를 총괄하는 배티 편집장이 직접 한국을 찾은 것도 국내 대학들의 높은 관심을 입증한다. THE뿐 아니라 QS도 국내 대학들 사이에서 세계평가 순위가 핫이슈로 떠오른 2000년대 중반 이후 수차례 방한해 행사를 갖고 있다.
대학들이 평가 순위 상승을 통해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국제적으로 인정받겠다는 데 토를 달 이유는 없다. 다만 출혈경쟁으로 인해 국내 대학이 ‘평가 장사’의 주요고객으로 전락하는 것은 문제다.
포스텍 서의호 평가관리위원장은 “배티 편집장이 이번에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방문했다”며 “사실 유럽이나 미국 대학들은 역사도 있고 안정돼 있어 랭킹을 발표해도 자극을 받지 않는 편이다. 반면 소위 ‘신흥시장’ 지역의 대학들은 순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투자하고 있어 아시아, 특히 한국 대학들을 봉처럼 여긴다는 말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들 해외 평가기관은 종합순위와 별도로 아시아지역 랭킹을 집계해 발표하고 있다. 그만큼 대학들의 관심이 높고 아시아 지역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주요대학의 한 평가 담당자는 “관련 홍보, 행사 후원 등 평가기관 비즈니스 수익의 약 50%가 아시아에서 나오는 것으로 안다”며 “특히 국내 한 언론과 손잡고 아시아대학평가 순위를 발표하는 QS의 경우 대학들에게 노골적으로 광고나 협찬을 요구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일부 평가기관의 웹사이트에는 PR 참여 패키지 가격까지 명시돼 있다. 중앙대 신재영 평가팀장은 “단계별로 가격대가 수만 달러 수준까지 올라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대학평가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평판도(reputation)에 영향을 끼치니 대학 입장에선 이를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귀띔했다.
자칫 교육에 대한 본질적 고민보다 보여주기 식 순위경쟁에만 목을 맬 우려가 있는 대목.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교육의 질적 내용으로 평가받아야 할 고등교육기관인 대학마저 돈 싸움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자금을 투입해 적극 홍보하는 게 곧 대학 발전’이란 그릇된 인식이 확산될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따라서 이제 대학들은 평가기관에 휘둘리지 않고 과당경쟁에서 탈출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대학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조직적 행동으로 현실화되는 추세다.
앞서 지난 2010년에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8개 주요대학 교수협의회 연합회가 “돈벌이로 악용되는 줄 세우기식 대학평가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냈으나, 대학들의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서의호 위원장은 “한때 대학평가를 거부하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 어느 대학도 선뜻 나서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곧 국내 주요대학들이 참여하는 한국대학랭킹포럼(가칭)이 출범할 예정이다. 평가기관이 지나치게 대학을 쥐고 흔드는 구조를 벗어나 공동대응을 통해 한국 대학들이 동반상승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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