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사] 생산량 늘리려는 농민의 욕구, 영국 산업혁명 불 지폈다

입력 2014-03-21 17:09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6)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시장의 힘이 농업혁신 퍼트려 수확량 증가하자 곡물가격 하락
많이 거둬들인 농민 살아남고 개량 동참하지 않은 농민 퇴출

전통·선천적 지위가 사라지고 잉여 노동력 제조업에 참여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명예와 수치를 알게 마련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변치 않는 참된 우정)의 주인공인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한 이 말은 경제 발전 과정에도 적용된다. 식량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식량 이외의 다른 것을 생산할 여력이 없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어야만 농업 이외의 다른 경제활동에 투입할 수 있는 근로자와 투자 자본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과거 번영을 누린 곳도 적지 않지만 어느 한 곳도 기근의 위협에서 벗어난 사회는 없었다. 17세기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주민의 80%가량이 농사를 지어야만 전체 인구를 겨우 먹여살릴 수 있었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대량 아사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사회제도는 물론 사람들의 생각까지 지배했다. 가령 1846년, 1848년, 1852년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기근’으로 인구 800만명 중 100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와 시장, 특히 곡물 관련 시장의 통제 및 부자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당연시되고 사람들은 숙명론에 압도됐다. 농업생산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해 변덕스러운 날씨나 정부정책이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되지 않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농업 개선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됐다. 경작이 지속되면 토지 자양분이 고갈되는데, 과거 전통적인 해결책은 지력이 회복될 때까지 휴경하는 것이었다. 항상 경작지 일부를 휴경지로 만들어 지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이 방법은 경작지의 3분의 1이나 4분의 1을 생산에서 제외시켜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일부 농민은 휴경 대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눠 계절에 따라 곡물, 순무, 건초, 클로버 순으로 돌려짓기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해 지력을 회복시키는 클로버는 가축의 사료로도 이용됐다. 결과적으로 경작면적이 3분의 1 정도 늘어나는 효과를 보게 됐다.

영국에서는 일부 농민이 업앤드다운(up-and-down) 경작 방식을 택했다. 지력이 가장 좋은 땅에 3~4년간 곡물을 경작한 다음 5년간 방목지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기간에 가축의 분뇨와 질소고정(窒素固定) 식물들이 지력을 회복시켰다. 네덜란드처럼 휴경지를 없애고 항상 뭔가를 재배함으로써 경작지가 늘어나는 효과를 봤다. 이에 따라 파종 대비 수확량, 노동 대비 생산량,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모두 증가했다.

일부 농민이 이룩한 혁신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데에는 저항이 따르고 이를 극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농업혁신이 전 사회에 수용되도록 한 가장 큰 힘은 ‘시장의 힘’이었다. 농업혁신으로 수확량이 증가하자 곡물가격이 하락했는데 혁신에 동참한 농민들은 훨씬 많은 양을 수확했기 때문에 여전히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동참하지 않는 농민은 시장에서 퇴출됐다.

개량한 농업기술은 수확량을 늘린 것뿐 아니라 지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도 일으켰다. 사람들은 변화를 보다 쉽게 받아들이게 됐으며, 자연이나 권위에 굴종하는 경향도 줄어들었다. 시장 생산과 그에 따른 시장의 조정 과정이 작동하자 전통과 물려받은 지위에 의존하던 고착된 생활방식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농업개량으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에서 쫓겨났지만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1648~1650년 영국은 지독한 흉년을 맞았고 곡물가격이 치솟았지만 사망률은 큰 변동이 없었다. 곡물가격이 가끔 급등하더라도 기근이 재앙으로까지 번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이후 영국은 더 이상 기근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연간 농업생산량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으며, 이 수준은 1850년대까지 이어졌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랐다. 봉건적 특권층이 프랑스 농촌을 장악했고 농민들은 항상 부담 속에 살아야 했다. 왕은 농민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조세를 거둬들였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곡물을 운송할 하천과 운하망도 잘 갖춰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한 지역에 흉년이 들면 다른 지역에 곡물이 풍족하더라도 아사 지경에 처하곤 했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구체제에 대한 의미 있는 개혁도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농업개량 차이는 왜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를 제공한다. 더 적은 사람이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더 많은 사람을 먹여살릴 수 있게 되자 더 많은 사람이 다른 직종에서 일하고, 수입도 늘어 여러 제품을 구매하게 된 것이다. 기근 없는 세월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아사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농업 이외의 분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인력과 자본이 농업 이외의 다양한 경제활동에 활용된 것이다.

농업혁명이 없었다면 산업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적은 자금과 노동력으로 많은 식량을 생산하게 된 농업혁명은 근대 초기를 강타한 혁명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혁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전략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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