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승민(엄태웅 분). 여느 때처럼 야근으로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어느 날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한가인 분)가 불쑥 찾아온다. “나 기억 안 나? 대학교 1학년 때, 음대 다녔던….” 승민은 그제서야 15년 전을 떠올린다. 첫사랑 서연이다. 영화는 그녀가 승민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풋풋한 대학교 새내기 시절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지만 끝내 알아채지 못한 채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남녀가 30대 중반에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영화 속 캐치프레이즈처럼 누구나 한번쯤 아프고 설레었던 시기로 시계바늘을 돌리고 있다.
애틋한 첫사랑의 기억
건축과 1학년인 승민(이제훈 분)과 음대생 서연(수지 분)은 ‘건축학개론’이라는 수업에서 처음 만난다. 같은 동네(서울 정릉)에 사는 둘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수업 과제를 하다 자연스레 가까워진다. 서연은 어느 날 승민에게 자신이 살고 싶은 미래의 집을 그려 보이며 나중에 내 집은 네가 꼭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날 승민은 버스정류장에서 자신에게 기대 잠든 서연에게 몰래 ‘도둑 키스’이자 첫 키스를 한다.
승민은 서연에 대한 마음을 점점 키워가지만 서연은 돈 많고 인기 좋은 건축학과의 다른 남자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선배가 술에 취한 서연을 부둥켜안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뒤 승민은 애틋한 첫사랑에 종언을 고한다. 돌이켜 보면 사소한 오해가 빚은 ‘참사’였지만….
좀처럼 경제학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던 영화는 승민과 결혼을 앞둔 사내 약혼녀 은채(고준희 분)의 등장으로 틈을 열어준다. 유명한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체감의 법칙’이다. 은채를 대하는 승민의 태도는 시종 심드렁하다.(그렇다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약혼녀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승민은 “사무실 안에서 담배 좀 피우지 마”라며 핀잔을 주는 그녀에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야, 직접 피우는 나는 오죽하겠니?”라며 되레 짜증을 낸다.
‘한계효용의 법칙’은 쿨하다
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경제적 후생이나 만족감 등 주관적 지표를 ‘효용(utility)’ 또는 ‘기대효용’이라고 부른다. 사랑을 통해 느끼는 감정들도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첫사랑은 강렬하면서도 애잔하다. 누구나 첫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다. 따라서 효용도 첫사랑이 가장 크고 강력하다.
한계효용의 법칙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할 경우 추가적으로 느낄 수 있는 효용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을 지칭한다. 더운 여름철에 먹는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 한 개는 매우 큰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같은 아이스크림을 두 개, 세 개 연달아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두 번째 먹은 아이스크림은 첫 번째만 못할 것이고, 서너 개가 되면 초기의 만족감이 거부감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만날 때마다 가슴 설레지만 만남이 거듭되고 서로에 익숙해져 갈수록 무덤덤해진다. 때로는 일상적 관계의 지속에 질려하거나 실망할 때도 있다는 게 대개의 우리 경험담이다.
이 같은 흐름을 <그래프1>의 효용함수로 설명하면 이렇다. X축을 시간(또는 횟수), Y축을 효용으로 둔 효용 함수 그래프는 위로 볼록한 곡선 형태를 띠며 기울기가 점차 평평해진다. 그래프상의 a와 b지점을 비교하면 절대적 효용의 크기는 b가 a보다 더 크다. 그러나 해당 지점에서 시간 혹은 횟수가 증가할 때(오른쪽으로 이동할 때) 추가적으로 늘어나는 Y값, 즉 추가적인 효용(한계효용)은 줄어든다. 기울기가 평평해질수록 특히 그렇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첫사랑 이후 승민이 추가로(?) 만난 여자들 그 누구도 서연만큼의 효용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 것 같다. 승민은 서연과의 재회 이후 약혼녀와 함께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도 서연과의 옛 추억을 떠올린다. “나 살찐 것 같아. 드레스가 야한 것 같기도 하고”라고 칭얼거리는 약혼녀의 말에 제대로 귀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프1>의 b지점에서 한계효용이 가장 높았던 a지점을 그리워하는 셈이다.
왜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나
승민은 서연과 함께 집을 짓는 과정에서 15년 전 감정을 조금씩 되짚어 간다. 남편과 산다던 서연이 사실은 이혼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은채는 승민과 결혼할 것이란 점을 은근히 내세우며 두 사람 사이를 경계하지만 ‘집 짓기’는 계속된다. 준공을 코앞에 두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며 갑자기 설계를 바꿔달라는 요구도 승민은 승낙하고야 만다. 그렇게 사연이 담긴 집을 완성하던 날, 승민은 서연에게도 자신이 첫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둘은 15년 전 하지 못했던 뜨거운 입맞춤으로 ‘효용의 극대화’를 이룬다. 이 대목에서 일부 관객들은 둘의 극적인 결합을 기대했을 수도 있지만 영화의 전개는 의외로 쿨하다. 승민은 서연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도 서연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이는 기대 효용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된 ‘위험 회피 성향(손실 회피 성향·risk/loss aversion)’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 주체들이 때로는 새로 얻게 되는 이익보다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잃는 데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이는 X축을 재산 혹은 소유분으로, Y축을 효용으로 놓은 또 다른 효용 함수 <그래프2>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프의 a지점에서 오른쪽인 b지점으로 이동할 때 증가하는 효용보다 a지점에서 왼쪽인 c지점으로 감소하는 Y값이 더 크다. 되풀이 설명하자면 효용 곡선이 위로 오목하다. 예를 들어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1000만원짜리 내기를 하자고 달려들면 대개 망설이게 돼 있다. 한계효용 체감 법칙에 따라 내기에서 1000만원을 딸 때 증가되는 효용보다 1000만원을 잃을 때 줄어드는 효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승민이 서연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서연을 새로 얻어 생기는 한계효용보다 은채를 버렸을 경우의 한계비용이 더 크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높다.
위험을 피하는 세 가지 방법
경제학자들은 경제 주체들이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고 말한다. △보험을 들거나 △여러 곳에 분산 투자를 하거나 △저위험-저수익 투자(위험을 적게 지는 대신 얻는 이익도 적어지는 투자)가 그것이다.
꿈에 그렸던 첫사랑과의 재회 대신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약혼녀와 예정대로 결혼을 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쪽을 선택한 승민은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 첫사랑에 비해 감정은 다소 덜하더라도, 차근차근 준비해 마련한 인생경로를 걸어가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다는 점에서 마지막 선택지에 가까울 것이다.
정소람 한국경제신문 기자 r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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