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6) 우리나라 고대는 노예제 사회였는가?

입력 2014-03-21 18:12   수정 2014-03-22 03:39


노예제 문제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난제다. 그리스·로마시대의 노예(slave)에 해당하는 신분은 ‘노비’(奴婢)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노비가 전체 인구의 3~4할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접하면 무척 당혹스럽다. 예를 들면, 17세기 초의 호적에서 산음현은 41.7%, 단성현은 무려 64.4%의 인구가 노비였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노예가 전체 인구의 대략 3~4할이었고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에서도 3분의 1 정도였기 때문에 만약 노비가 모두 노예라면, 적어도 조선 전기는 전형적인 노예제사회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서양사의 기준에서 보면 고대에서 발전을 멈추어 버렸다는 뜻인가? 중세에 속하는 조선시대가 노예제 사회였다면 그보다 앞선 고대는 도대체 어떠한 사회였다는 말인가? 서양의 고대와 마찬가지로 노예제 사회였는가?

노예는 친족과 단절된 ‘사람 재산’

노예는 두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재산’이 된 사람, 둘째는 친족관계(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사람이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친족관계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동시에 친족관계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에 주인의 뜻대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에서 발생한 포로를 처리하는 방법에서 기원하였다고 추측되는데 포로를 죽이거나 대가를 받고 풀어주는 대신 일을 시키기로 한 것이다. 공동체의 규칙을 어겨서 ‘사회적 죽음’을 당한 자도 노예가 되었는데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는 점에서는 전쟁포로와 마찬가지였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채무를 갚지 못한 자들로서 공동체 안에서 살지만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밖으로 추방된 자들이었다.

우리나라의 고대에도 전쟁 포로를 노예로 만들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369년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장군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백제가 554년에 신라를 침공하여 남녀 3만9000명을 잡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진흥왕은 562년에 가야를 평정한 공이 큰 사다함에게 포로 200명을 주었는데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전쟁 포로를 노예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포로 중에 소수만 노예가 되었다.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우리 강토를 침략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해쳤는데 장정을 잡으면 살육하고 어린아이는 ‘노’로 사역하는 것이 오래되었다”(『삼국사기』)라고 말한 것처럼 포로가 된 군인이나 장정은 죽이고 점령지의 여자나 아이들은 살려두어 노예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삼국사기』에 삼국 간에 군인을 죽인 예는 매우 많아서, 일례로 진흥왕 15년(554)에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백제의 사졸 2만9600명을 참수하였다.

전쟁포로 죄인 빚 못 갚으면 노예

법을 어기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경우에도 노예가 되었다. 부여에서는 사형당한 죄인의 가족을 노비로 만들었으며, 고조선의 8조 법금에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고구려에서도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자녀를 노비로 주어 대신 갚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9세기 말의 효녀 지은(知恩)의 예와 같이 가난하여 생존이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이나 자식을 노비로 팔기도 하였다. 지은은 신라 사람으로 본래 양인이었는데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자 부잣집에 자신을 팔아서 여자종인 ‘비’가 되고 쌀 10여석을 받았다. 모녀가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여 통곡하는 것을 지나가던 화랑 효종랑이 보고 불쌍하게 여겨 좁쌀 100석을 보내주었는데 주인에게도 보상하여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었다는 미담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런데 백제왕이 광개토왕에게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한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이나 신라에 정복된 지방민을 ‘노인’(奴人)이라고 칭하고 이들에게 적용하는 법을 ‘노인법’(奴人法)이라고 지칭한 신라의 울진 봉평비(524년)의 기록은 삼국시대 당시의 ‘노’가 당대의 중국이나 후대의 노비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노예 주인과 노예 간의 개인적 소유관계에 있는 사람을 ‘노’라고 한 것이 아니라, 국가 간의 외교관계나 정복에 의한 집단적 복속관계를 ‘노’라고 표현하였으며 집단적 예속민을 ‘노인’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노인’이지만 누구의 재산도 아니었으며 친족관계에서 분리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코 노예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 고대인들은 노예를 노비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에 소개된 우리말 ‘갯지’(皆叱知)라고 불렀다고 한다. ‘갯지’는 개라는 뜻으로 주인을 개처럼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피정복 주민은 노예와 달라

이처럼 노비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고대에 노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들은 어떠한 일을 하였으며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였을까? 노예제 연구의 권위자인 영국의 역사학자 M. Finley(1912~1986)는 어떤 사회가 ‘노예제사회’가 되려면, 노예가 생산 활동의 주된 원천이어야 하며, 노예제가 생산은 물론 법이나 정치, 그리고 도덕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측면을 규정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고대 그리스가 노예제사회가 되었던 것은 토지의 사적 소유로 인하여 가족 노동력만으로는 경작할 수 없는 대토지 소유가 발생하는 한편, 자가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 생산물을 처리할 수 있는 시장도 성립해 있었지만 그리스 사회 내부에서는 필요한 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시민들은 타인을 위해 노동하는 것을 타인에게 예속된다고 생각하여 기피하였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동자와 노예를 구별하는 말 자체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고대사회에서도 농업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사회 내부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예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가?

포로로 사로잡은 노예라도 부양과 감시에 비용이 들기 때문에 노예는 결코 공짜가 아니며 노예 외에는 대안이 없거나 적어도 노예를 사용하는 것이 다른 대안보다 유리하지 않다면 노예제 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나라 고대의 피지배층을 중국의 역사서는 하호(下戶)라고 하였는데, 부여의 호민(豪民)이나 고구려의 좌식자(坐食者)와 같은 지배층은 이들로부터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다. 호민이 하호를 노복과 같이 부렸다고 하였듯이 이들은 예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타인의 재산이나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자들이 아니었다.

노예 비중 낮아 노예제사회는 아님

고대국가의 일반 백성으로서 신라는 이들에게 722년에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분명히 전쟁포로를 비롯하여 범죄와 채무 등 여러 경로로 노예가 된 자들이 있었고 신라 귀족의 집에 ‘노동’(奴) 3000명이 있었다고 하지만, 농업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하호와 같은 예속적인 농민들로부터 충분히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에 노예를 대거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1933년 일본 동대사(東大寺)의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815년)는 국가에서 서원경(청주) 부근의 4개 촌락의 호구와 전답, 과실나무와 가축의 수효를 조사한 매우 귀중한 자료인데, 전체 인구 460명 중에 노비는 28명으로 6.1%에 불과하였다. 이들 노비가 모두 노예였다고 하더라도 노예제 사회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비중이다. 노예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가사노동이나 노동조건이 가혹한 광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였으며, 일부는 귀족에게 예속된 군사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는 노예를 보유한 사회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농업생산에서 노예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는 점에서 노예제사회는 아니었다.

현재도 전 세계에 2500만명의 노예가 있다고 한다. H. J.Nieboer(1873~1920)는 토지가 풍부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하고 기술이 단순한 사회에서 노예제가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극심한 빈곤, 아무도 일하려고 하지 않는 열악한 노동조건, 자발성이 필요 없는 단순한 기술,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려는 사람이 있는 한 노예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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