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노믹스] 작은 정보에 대한 맹신이 계유정난 불렀다

입력 2014-03-28 18:20  

< 계유정난 : 단종 축출을 위한 수양대군의 쿠테타 >

파도 보다는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봤어야…

문종은 내경에게 역모 일으킬만한 사람의
관상을 살펴볼 것을 명하는데…



[ 이승우 기자 ]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관상’을 통해 본 정보경제학


“수양대군은 전하를 두려워하며 그 그릇이 결코 왕위 찬탈을 감행할 그릇이 못 되옵니다.” (내경)

영화 ‘관상’의 등장 인물 내경(송강호 분)은 얼굴을 보면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천재 관상가다.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한양에서 찾아온 기생 연홍(김혜수 분)이 거짓말을 하자 “도홧빛이 돌고 입술이 붉은 게 무당 끼가 있어 보이긴 한데…. 무당 될 팔자는 아니고…. 무슨 꿍꿍인진 모르나 거짓말할 거면 가라는 것이지요”라며 대번에 간파해낸다. 내경의 실력에 감탄한 연홍은 거액의 계약금(?)을 주고 자신이 운영하는 한양의 기생집으로 그를 데려온다. 술을 마시러 온 고객들의 사주를 봐주는, 요즘말로 ‘사주 카페’와 비슷한 곳이다.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내경은 금세 유명인이 된다. 당대의 정치가였던 좌의정 김종서(백윤식 분)는 그를 눈여겨보고 임금인 문종(김태우 분)에게 데려간다. 문종은 내경에게 역모를 일으킬 만한 사람의 관상을 살펴볼 것을 명한다.

정보는 매력적인 상품

고전경제학은 모든 거래 당사자들이 완벽하게 정보를 갖추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합리적 행동은 차치하더라도 완전한 정보 자체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정보를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이유다.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정보 역시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는 특정 인물의 프로필이나 기업 혹은 국가의 신용과 관련한 정보를 거래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지 애컬로프 UC버클리대 교수는 2001년 조지프 스티글리츠, 마이클 스펜스와 함께 정보경제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1970년 발표한 ‘레몬 시장(Market for Lemons)’(→정보의 비대칭으로 불완전판매가 이뤄지는 중고차시장의 문제를 분석한 논문)이란 논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요즘 말로 치면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불완전 판매’가 이뤄지는 중고차를 겉은 예쁘지만 속은 아주 신 레몬에 빗댄 표현이다. 중고차 시장에서 차량 품질에 대한 정보는 파는 사람이 독점하고 있다. 일반적인 시장에선 상품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늘어나지만 중고차 시장은 자동차 가격이 지나치게 낮으면 ‘혹시 사고 차량 아니냐’는 의심이 들어 되레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정보의 불균형으로 수요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역선택’이라고 한다. 애컬로프 교수는 정보가 부족하면 시장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효율적으로 자원이 배분되지 않는 시장 실패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지적한 인물이기도 하다.

관상 통한 ‘선별’ 행위

모든 정보 가운데 가장 값진 정보를 꼽으라면 ‘정확한 미래’일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의 데이터를 분석해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하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내경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앞날까지 상당히 높은 확률로 알아맞히는 신기(神技)를 갖고 있다. 그가 단시간 내에 한양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임금까지 그를 찾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종의 걱정은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의심 가는 사람은 몇 명 있지만 누가 왕위를 찬탈할 역모를 꾸밀지 확신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정보경제학은 정보가 불완전한 상황에서는 이를 변수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경제주체들이 갖고 있는 정보의 양이 차이가 날 때 최종 결과의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경제주체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이 같은 노력을 ‘선별(screening)’(→경제주체가 간접 방법을 통해서라도 상대방의 정보를 얻으려는 행위)이라고 부른다. 문종이 내경에게 그들의 관상을 살피라고 한 것은 일종의 선별 행위인 셈이다.

내경은 왕의 뜻을 받들어 ‘역모 후보자’를 차례대로 살피기 시작한다. 내관으로 변장해 후보자를 찾아가 왕이 그림을 하사했다며 관상을 보는 식이다. 내경은 영의정 황보인에 대해선 “한눈 팔지 않고 한 길만을 달려온 전형적 사대부로 현실에 만족하고 게으른 면도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안평대군, 신숙주도 역모의 상은 아니라고 고한다. 마지막으로 문종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수양대군에 대해선 “작은 쾌락에 만족해 살아가는 인물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역선택 이끌어낸 수양대군

문종은 내경의 말을 믿고 내심 안심한다. 내경의 평가에 상당한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문종이 병으로 승하한 뒤 내경은 김종서에게 이 일을 고한다. 수양대군의 평가를 들은 김종서는 내경에게 “어리석은 소리”라고 일갈하며 직접 수양대군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수양대군(이정재 분)을 본 내경은 그가 과거에 봤던 인물이 수양이 아니라 그의 심복이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역모에 대한 의지로 가득찬 수양대군이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기만전술’을 폈던 것. 수양대군의 본래 얼굴을 본 내경은 공포감에 떨면서 “남의 약점인 목을 잡아 뜯고 절대로 놔주지 않는 잔인무도한 이리. 이 자가 진정 역적의 상”이라고 중얼거린다.

수양대군은 그만큼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문종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 관상가를 기용해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 그 관상가가 상당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을 오판하게 만들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그렇게 역사의 한줄기를 바꿨다.

훗날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가 내경을 찾아가 거사(계유정난)를 일으킨 자들의 관상을 기록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역모로 정권을 잡은 업보로 내부의 또 다른 역모 가능성을 늘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경의 반응은 탄식이었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은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완벽한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완벽한 판단은 없다는 한탄이었다. 큰 정보와 작은 정보를 구별하지 못하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정보의 흐름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지력의 유한함에 대한 자조이기도 했다.그것은 우리 현실 경제의 모습과도 꼭 닮았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 이전에 부나방처럼 파생금융상품을 사고 팔았던 사람들, 미국 양적완화의 출구전략이 임박해 있는데도 신흥국 시장으로 부지런히 돈과 사람과 물자를 베팅했던 군상들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승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lees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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