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모델로 삼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까?”
기자가 국내 제약사 사장들을 만나 인터뷰할 때마다 묻는 단골 메뉴다. 117년 역사의 국내 제약 생태계에서 여태 매출 1조원짜리 회사가 하나도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나온 질문이다.
그런데 제약사 경영자들이 한결같이 닮고 싶다고 꼽는 회사가 하나 있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스라엘 국적의 ‘테바(Teva)’다. 한 제약사 사장은 “테바는 1901년 창업한 업력이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신생국에서 성장한 제약사라는 점에서 우리와 여러모로 닮았다”고 설명했다.
테바는 세계 제네릭(복제약)시장 1위 업체다. 제네릭 사업 위주인 국내 업체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하다. 유럽에서 팔리는 제네릭 여섯 개 중 하나가 테바 제품이다. 미국에서는 일곱 개 중 하나꼴로 처방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매출은 203억달러(약 21조원), 글로벌 순위 9위다.
가장 닮고싶다는 테바
그런데 테바를 들여다볼수록 정작 테바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제약사와 별반 다를 것 없던 테바가 1990년대 이후 20년 만에 압축성장한 비결은 제네릭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인수합병(M&A)과 신약 개발이 성장의 핵심 동인이었다.
테바는 1980년대까지는 자국 내 M&A로 덩치를 키웠다. 내수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뒤 국책 와이즈만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이 회사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다발성경화증 치료제를 들고 미국에 진출했다. 이 제품은 해마다 4조원어치가 팔리는 ‘메가 드러그’로 성장했다. 신약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2005년 미국 내 제네릭 1위 업체 ‘아이벡스’를 74억달러에 인수하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제네릭 1위에 올라선 것이다.
반면 우리 제약업계는 117년 동안 상위업체 간 제대로 된 M&A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회사 간 결합을 ‘터부’시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지난 2월 녹십자가 일동제약 지분을 29%까지 늘려 2대주주에 올라섰을 때도 같은 기류였다. 녹십자는 “적대적 M&A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M&A 무풍지대 국내 제약산업
변화를 외치는 경영자가 없는 건 아니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제약사 사장은 “그동안 제네릭 장사에 안주한 탓에 지분을 내놔가면서 M&A를 고민할 유인이 없었다. 게다가 은행에서 돈을 빌려가며 신약 개발을 한 것도 아니라서 금융권 같은 외부에 의한 구조조정도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제약회사들끼리 M&A를 적극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산업은 15조원 시장을 260개 완제 의약품 업체가 나눠 먹고 있는 구조다. 1조원 매출은 고사하고 2000억원 이상 규모도 단 20개에 불과하다. 정부는 끊임없이 약가 인하 정책으로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있다. 제네릭 팔면서 선대가 물려준 가업을 지키겠다는 ‘수성 전략’으로는 생존마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녹십자와 일동제약을 비롯한 업체 간 M&A를 더 이상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지금 국내 제약업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M&A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디오니소스적 기업가 정신이 아닐까.
김형호 중소기업부 차장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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