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8) 우리나라 중세는 서양 중세와 무엇이 달랐는가

입력 2014-04-04 18:47   수정 2014-04-07 13:04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식민지시대부터 우리나라 중세가 서양의 중세와 닮은 점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근대 이후 세계를 제패한 유럽의 역사가 정상적인 발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본만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였던 이유가 봉건제를 경험하였기 때문이라는 역사관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인류가 원시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단계를 밟아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전진하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었던 마르크스 주의 역사학자에게는 그러한 역사법칙이 한국사에서도 관철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미래의 전망을 위해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한국 중세에서 봉건제를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군사력을 보유한 영주들이 국가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영지를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서양 중세와 국왕이 과거제도로 선발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전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한국 중세를 똑같이 봉건제 사회라고 칭하기 위해서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집권적 통치와 지방 영주들이 지배하는 분권적통치

무엇보다 서양 중세의 분권적인 정치체제와 대조적인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봉건제 앞에는 ‘아시아적’, ‘집권적’, ‘국가적’, ‘관료적’과 같은 다양한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천동설을 지탱하기 위해서 주전원을 고안한 것과 같았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학술적 곡예를 통해서 다른 점은 모두 지우고 남은 봉건제는 대토지소유자가 토지소유에 기초하여 타인노동을 착취하는 제도일 뿐이었다.

이러한 공통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한 사회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정보량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대토지소유자, 지주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봉건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삼국시대부터 식민지기의 지주제 그리고 심지어 농지개혁 이후의 지주제에 대해서까지도 봉건제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서양 중세와 한국 중세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면 대토지소유 외에도 같은 점이 많았다. 두 사회 모두 생산성이 낮은 농업사회였으며, 따라서 경제성장이 인구증가에 의해서 추월당하는 ‘맬서스 함정’(본 시리즈 3회 참조)에 빠져 있는 사회였다. 저축을 거의 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면 유력자에게 예속상태로 전락하기 쉬웠다.

서양 중세의 농민들은 거의 전부 영주에게 예속되어 있었던 농노였으며, 한국 중세에 있어서도 노비와 같이 주인에게 예속된 사람들이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하였다. 또한 낮은 농업기술 수준에서는 가족만으로는 경영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친족이나 이웃과의 유대관계에 강하게 의존해야만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사 책에서 ‘봉건’이라는 단어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역사에 필연적인 발전법칙이 있다는 역사관이 퇴조하는 한편, 봉건제가 없기 때문에 한국사가 정체되었다고 주장하는 역사관이 극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각 사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각자의 자원과 지식의 한계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한 사회는 오래 존속하고 경제적으로도 번성할 것이며,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사회는 쇠퇴하여 도태될 것이라는 점이다.

서양 중세나 한국 중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였지만 오래 존속하였다는 점에서 문제풀이에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려왕조(918~1392)는 475년, 조선(1392~1910)으로 519년을 지속하였는데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힉스 “전쟁 끝난 사회는 봉건제나 관료제로 전환”

1972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이론 경제학자인 힉스(John Hicks, 1904~1989)는 특이하게 『경제사의 이론』(1969)이라는 의미심장한 작은 책을 썼는데, ‘군사적 전제주의’의 지령경제가 평시체제로 전환하면서 봉건제와 관료제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에서는 전 사회의 자원을 하나의 리더십에 집중시키는 동원체제가 효율적이기 때문에 총동원 체제인 군사적 전제주의 체제가 수립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비상체제를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평시체제로 전환하면서 봉건제와 관료제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군대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그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도록 하는 경우에는 분권적인 봉건제 사회가 성립하게 되며, 국가가 별도로 군사재정을 관리하는 경우에 관료제사회가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관리를 충원하기 위한 관리 선발제도, 지방 관리의 토호화를 방지하기 위한 승진제도, 그리고 관리를 감시하기 위한 감사제도를 갖춤으로써 관료제는 안정적인 제도로서 완비되었다.

한국의 중세는 봉건제가 아닌 관료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관료제는 봉건제에 비하여 훨씬 달성하기 어려운 기획이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서양사에서는 로마제국의 멸망 후 관료제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기 때문에 봉건제 사회가 성립하게 되었다. 특히 8세기부터 200년에 걸친 이슬람, 노르만, 마자르의 대공세를 국가가 대응하지 못하고 각 지방이 자체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관련이 깊었다. 이후 17세기의 절대주의시대에 가서야 관료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에 비해서도 매우 늦었던 것이다.

근대국가가 관료국가라는 점에서 보면 한국 중세가 선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시장경제 발전과 경제성장에 미치는 장기적인 효과는 서양의 봉건제가 긍정적이었다. 고려왕조나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관료제 사회로서 국가가 운용하는 물적 인적 자원의 규모가 컸고 이를 기초로 사회적 분업과 경제통합을 국가가 주도할 수 있었다. 국가는 토지와 인구를 양안(量案)과 호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직역제도와 지방제도(군현제)를 통해서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배분하는 한편, 재정제도를 통해서 지역 간 물자 이동을 수행함으로써 전국적 경제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세곡과 공물을 수도의 창고로 운송하기 위하여 조창과 조운제도를 갖추었으며(그림) 교통로마다 역을 두어 신속한 정보 전달을 도모하였다.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생존의 위기에 대비하여 곡물을 대량으로 저장하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상인과 시장도 존재하였지만, 국가의 경제적 역할이 컸기 때문에 국가에 종속되어 성장에 제약이 많았다.

관료제가 선진적이나 시장발전에는 봉건제가 유리

반면에 서양 중세의 봉건제 사회는 중앙집권적인 국가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경제통합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고 결국 그 공백을 시장과 도시의 상인이 메워나갔다. 영주가 지배하는 장원은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하였기에 봉건제사회는 낙후된 ‘자연경제’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절된 경제를 연결하기 위하여 상업이 발달하고 상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도시가 성장하여 상공인의 이익에 기초하여 시정을 운영할 수 있는 자치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서양 중세 봉건사회는 시장경제의 발달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게 되었는데,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 양안(量案)

조세 부과를 목적으로 전지(田地)를 측량하여 만든 조선시대의 토지대장을 말한다. 조선시대 20년마다 한 번씩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量田) 즉, ‘토지면적, 수확량 측량 및 소유주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양안을 작성하여 호조(戶曹) 및 해당 도와읍에 각각 1부씩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양안에는 자호, 지번, 양전방향, 토지 등급, 지형, 척수, 결부수, 사표, 진기(陳起), 주(主) 등을 기재하였다.

사진은 1712년 경자년에 작성된 경자양안. 출처: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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