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최고 흥행감독 '교만' 반성
"흥행, 사람의 힘으로는 모르는 것
젊은 취향의 영화 만들기 어려워"
[ 유재혁 기자 ]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은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당시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많은 46만명을 모았다. 이 영화는 이장호 감독(69·사진)의 데뷔작이었다. 이후 ‘바람 불어 좋은 날’ ‘어우동’ ‘외인구단’ ‘무릎과 무릎 사이’ 등으로 당대 최고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던 이 감독이 새 영화 ‘시선’(17일 개봉)으로 돌아왔다. 데뷔 40년 만이자, ‘천재선언’ 이후 19년 만의 신작이다. ‘시선’은 해외로 선교 활동을 떠난 9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반군에게 납치되며 벌어지는 종교영화다. 서울 남산 근처에 있는 배급사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람의 시선과 하나님 시선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람의 시선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죠. 순교는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희생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만 알 수 있는 ‘거룩한 배교(背敎·자신의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도 있습니다.”
이슬람 반군이 피납자들에게 성경과 기독교를 부정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강요하면서 선교사들은 갈림길에 봉착한다. ‘시선’은 영화진흥위원회가 거장들에게 연출 기회를 주는 프로젝트에 선정돼 현금 4억원, 현물 2억원을 지원받아 지난해 여름 캄보디아에서 50일간 촬영됐다. 오광록, 고(故) 박용식 등이 출연한 완성작을 본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 영화사가 배급하기로 했다.
“지난 19년간 ‘장길산’ ‘하얀전쟁’ 등을 연출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얀전쟁’은 결국 정지영 감독에게 넘겼어요. 정신 못 차린 채 술 마시고 바람피우며 방탕한 삶을 살던 제게 벌을 내린 거죠. 하나님이 저를 광야로 내보내려고 하신 듯합니다.”
그는 1986년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히트한 것을 정점으로 27년간 내리막길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듬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도쿄영화제에 출품한 그는 교만에 사로잡혀 작품상을 받을 것으로 자신했다고 한다. 물론 실패로 끝났다. 영화 ‘와이 스토리’도 흥행에 참패했다. 같은 해 그는 운전 중 보행자를 숨지게 하는 교통사고까지 일으키면서 집을 경매에 넘기고 말았다. ‘명자 아끼꼬 쏘냐’ ‘핸드백 속의 이야기’ 등 7편을 연출 혹은 제작했지만 줄줄이 흥행에 참패했다.
“흥행은 사람의 힘으로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도 제가 매너리즘에 빠진 거겠죠. 긴 방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믿으면서 2년 전 장로가 됐어요. 문득 제가 연출한 작품들이 죽음을 권하는 영화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명을 권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더군요. 인간의 시선에는 악마적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선으로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 거죠.”
그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 감독이 요절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일본에서는 중년 관객을 타깃으로 한 영화시장이 형성돼 있지만 한국에서는 나이가 들면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 취향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인문학적인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광고처럼 스토리 없이 빨리 움직이는 영상에 길들여져 있어요. 문자와 언어를 결핍한 채 오디오 비디오에 특수훈련을 받은 세대입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죠. 영화를 만들기가 어려워요.”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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