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유창재 기자 ]
캐나다의 대형 제약사가 행동주의 투자자를 앞세워 경쟁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섰다. 기업이 몸집 불리기를 위해 이른바 ‘기업사냥꾼’과 손을 잡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명 행동주의 헤지펀드 매니저 빌 애크먼이 캐나다 밸리언트제약과 함께 미국 보톡스 제조사 엘러간의 인수를 추진 중이라고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SJ는 최근 들어 행동주의 투자자에 대한 기업 인식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함께 경쟁사 인수에 나선 것은 흔치 않은 사례라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수금액이 최소 5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업사냥꾼과 대기업의 ‘이례적 동침’은 애크먼이 지난 2월 밸리언트에 접근하면서 시작됐다. 지난해 미국 콘택트렌즈업체 바슈롬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M&A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는 밸리언트에 협상을 돕겠다고 제안한 것. 이에 마이클 피어슨 밸리언트 최고경영자(CEO)는 엘러간을 타깃으로 지목했다. 안약, 콘택트렌즈 등 ‘아이케어’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회사다. 애크먼이 이끄는 퍼싱스퀘어캐피털은 즉시 40억달러를 투자해 엘러간 지분 9.7%를 확보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보통 타깃 기업이 있으면 지분 일부를 사들인 뒤 경영진을 압박해 기업 가치를 높이고, 이후 지분을 팔아 이익을 낸다. 하지만 애크먼은 원매자를 미리 찾아 놓는 방식으로 경영진 압박 단계를 생략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밸리언트 입장에서는 적대적 M&A 추진에 앞서 약 10%의 우호지분을 미리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적대적 M&A를 많이 해본 애크먼의 경험도 활용할 수 있다.
밸리언트는 지난해 59억5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맥킨지 출신의 피어슨 CEO는 밸리언트를 2016년까지 세계 5대 제약회사로 성장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엘러간은 주름치료제 보톡스로 유명한 특수의약품 전문 제약사로 지난해 63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미용치료제 시장의 공룡이 탄생한다. 밸리언트는 특히 이번 합병을 통해 연구개발(R&D) 비용을 25억달러 이상 줄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날 WSJ 보도 이후 엘러간과 밸리언트 주가는 각각 6.0%, 3.2% 올랐다.
한편 애크먼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 지분을 사들인 뒤 경영진 교체, 구조조정 등을 통해 주가를 올려 되파는 전형적인 행동주의 투자자다. 1994년 설립한 퍼싱스퀘어캐피털을 통해 웬디스, 타깃, JC페니, P&G 등에 투자한 경력이 있다. 최근에는 건강보조식품회사 허벌라이프의 사업 구조가 피라미드식 사기라는 의혹을 제기한 뒤 이 회사 주식을 공매도하기도 했다. 라이벌인 칼 아이칸이 허벌라이프의 손을 들어주면서 월가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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