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찍으면 인플레이션 걱정 없다?…요구불예금 잔액 늘려도 통화 증가

입력 2014-05-02 21:20   수정 2014-05-0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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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은 원래 소지자가 발행은행에 요구하면 언제든지 정화(正貨)로 교환해주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약속에 대한 신뢰가 유지되는 한 은행권은 정화와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통화학파는 정화의 수량을 넘어서는 은행권 발행이 물가상승과 경기변동을 일으키고 은행 위기를 초래하는 주범으로 인식하고 이를 막고자 했다. 이에 비해 은행학파는 은행권의 발권에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고 봤다.

1844년 영국의 로버트 필 총리(사진)는 통화학파 입장에서 필 조례(Peel’s Act)를 제정해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은행업의 건전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필 조례의 내용을 보면 첫째, 향후 모든 은행의 은행권 발행은 금 혹은 은의 새로운 획득에 의해 100% 지급 보증돼야 한다. 둘째, 신규 발권은행의 설립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셋째, 현존하는 각 지방은행의 평균 은행권 발행 잔액은 현재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넷째, 은행들이 병합되면 은행권 발행의 권리는 잉글랜드은행으로 이전된다는 것이다.

필 조례의 배경인 통화학파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 우선 국가에 의해 독점권을 부여받은 은행은 그 권한을 십분 활용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둘째, 은행권과 마찬가지로 요구불 예금도 통화 속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한국은행권 묶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요구불 예금 잔액을 늘려준다. 요구불 예금계좌 잔액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더 많은 은행권을 소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교환 수단을 가지게 된다.

1844년 필 조례가 제정되자 잉글랜드은행과 여타 은행들은 은행권 발행보다 대출을 통해 요구불 예금 잔액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즉각 인플레이션 붐이 발생했으며 영국 내외의 고객들은 예금을 정화로 상환받고자 몰려들었다. 잉글랜드은행은 의회를 설득해 필 조례 적용을 정지시킬 수 있었고 필 조례는 유명무실해졌다. 금본위제도가 영국에서 폐기된 1914년에 필 조례도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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