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사시 폐지 앞두고…신림 고시촌 고사위기…독서실·원룸 텅텅 비고, 식당주인 야반도주

입력 2014-05-03 09:00  

빛 바래가는 신림동 고시촌

서점·식당 줄이어 폐업…고시촌 학생 수 4년새 절반
일용직 종사자 1인가구 늘며 도시 슬럼화 우려 나타나
로스쿨생 유치·예술촌 형성 등 새로운 살길 모색 움직임도



[ 오형주 기자 ]
지난 1일 오후 6시 서울 대학동(옛 신림9동)의 우리은행 신림로지점 앞. 이곳은 ‘신림동 고시촌’에서 한때 ‘만남의 장소’로 불렸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데다 주변에 대형 고시학원이 즐비해 많은 고시생의 약속 장소로 유명했다. 하지만 최근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1980년대 이후 각종 고시 정보가 모이는 공간으로 신림동 고시촌의 ‘상징’으로 불렸던 ‘광장서적’은 지난해 초 1억6000만원 상당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났다. 그 자리엔 문구점과 식당이 들어섰지만,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도입하고, 2017년 이후 사법시험을 폐지하기로 한 이후 신림동 고시촌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2010년만 해도 사시, 행정·외무고시 등을 준비하며 이 일대에서 생활하던 고시생은 4만명을 넘었지만, 지금은 2만명 정도로 줄었다.

20대 중후반 젊은 고시생들의 소비에 의존했던 지역경제도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건물주·상인들을 중심으로 ‘사시 존치운동에 나서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지만, 과거 ‘호황의 기억’을 잊고 ‘고시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4년 만에 고시생 절반 이하로 줄어

‘신림동 고시촌’은 관악산에서 흘러나오는 도림천을 사이에 둔 옛 신림9동·2동(대학동·서림동) 일대를 말한다. 이곳엔 1960년대 강북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밀려온 철거민들이 정착했고, 1975년 서울대가 관악산 골프장 부지로 이전해 오면서 배후 주거지로 성장했다. 지하철 2호선 개통(1984년) 전후로는 사시 준비생들이 정보 교류와 주거비용 절약을 위해 모여들어 고지대에서부터 하숙촌을 형성했다.

고시촌은 1990년대 산기슭에서 신림9동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주변으로 내려와 지금과 같은 고시학원, 서점, 독서실, 복사집, 고시원, 고시식당을 아우르는 인프라를 갖추게 됐다. 젊은 1인 가구가 많아 1990년대 말에는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로 대표되는 PC방 열풍을 주도하기도 했다. 사시 선발인원이 1000명을 넘던 시절엔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시 준비생만 2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시 선발인원이 800여명으로 줄어든 2010년 이후 고시촌은 조금씩 쇠락하기 시작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800명을 선발한 2010년 사시에는 2만3244명이 지원했지만, 선발인원이 200명인 올해엔 7428명에 그쳤다. 불과 4년 만에 사시생 수가 3분의 1 미만으로 줄어든 것이다.

원룸·독서실 고사위기…지역경제 침체

한때 전체 고시생 중 70% 이상을 차지하던 사시생의 급감은 지역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

그중에서도 고시촌 주변 원룸들의 상황이 심각하다. 공실률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월 경찰간부 필기시험이 실시된 서대문구 명지고엔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 주인들이 찾아와 ‘방을 싸게 임대한다’는 홍보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또 일부 고시식당 주인이 야반도주해 몇 달치 식권이 휴짓조각이 되거나, 건물주가 근저당을 해결하지 못해 경매로 넘어가 고시생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고시촌 주변 독서실도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5년 전만 해도 1~2개월은 기다려야 입실할 수 있었던 대학동 T독서실의 좌석은 현재 절반이 비어 있다. 이 독서실 총무는 “사시생은 20%에 불과하고 그나마 행정고시 준비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2009년 15만원까지 치솟았던 한 달치 독서실비는 현재 12만5000원으로 떨어졌다.

고시생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저렴한 주거지를 찾는 중장년층 1인 가구들이 메우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학동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고시생 감소에도 불구하고 2008년 2만3037명에서 2012년에는 2만3283명으로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같은 기간 25~29세 인구가 4257명에서 3595명으로 감소한 반면 40~44세 인구는 1654명에서 2076명으로 증가했다.

한 서점 주인은 “새로 유입된 중년 인구의 상당수는 일용직 종사자들”이라며 “주민들 사이에선 ‘고시촌이 슬럼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변시생’ 유치가 살길…상인들의 변화

상인들은 활로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의 마지막 희망은 ‘로스쿨 변호사시험(변시) 불합격자’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변시 합격자는 지원자 2432명 중 1550명(63.7%)에 그쳤다. 불합격한 882명은 내년에 다시 도전해야 한다. 내년 변시에서도 1500명 정도를 선발할 경우 변시 재수생 수는 12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현실적으로 이들이 시험을 다시 준비할 각종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신림동 고시촌’밖에 없는 만큼 다시 이곳 상권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상인들은 기대하고 있다. 베리타스법학원 인근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김정식 씨는 “변시 불합격자가 해마다 400명씩 증가하면 사정이 다소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분위기는 서점에서 느낄 수 있다. 법문서적·한국서점 등 고시서점들은 매장에 사법연수원 교재 등 변시 수험서를 대거 비치했다. 인터넷 판매분까지 합하면 이미 사시 수험서 판매량을 앞질렀다. 안황광 한국서점 대표는 “늘어나는 변시생들이 사시생들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고시학원들도 발 빠르게 변시생 유치에 나섰다. 한림법학원과 베리타스법학원은 지난달 말 변시 강의를 개설했다. 한림법학원의 민법강의실 2곳은 변시생 100여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원들은 5월부터 12월까지 운영되는 종합반 수강생도 모집 중이다. 수강료는 최대 650만원이나 된다. 지방대 로스쿨을 졸업한 박모씨는 “내년 시험까지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 불안한 마음에 올라왔다”며 “수강료가 비싸지만 이곳에서 지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800명 수준인 변시생들만으론 떠나간 사시생들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일부 건물주와 상인들이 사시 존치운동에 나서고 있는 이유다. 지난 3월14일 대학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사시존치 간담회에는 50여명이 몰렸다. 한 서울시의원 예비후보는 “모든 주민·상인들이 합심해 사법시험을 지켜낼 것”이라고 공약했다.

“언제까지 고시촌인가”

현실을 직시하고 ‘고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먹거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20년 이상 고시촌에서 수험서 헌책방을 운영하다 지난해 대형서점 ‘북션’을 차린 정성훈 대표는 “과거와 같은 영광이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고시 수험서에 목매지 않고 일반 교양서 등 다양한 책을 판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층 1인 가구 비중이 높은 신림동 고시촌을 문화예술창작촌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구상도 나왔다. 관악구청의 의뢰를 받아 ‘고시촌 재생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임진철 청미래재단 대표는 “‘몰입과 집중’이라는 고시촌의 특성을 살려 작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관악구청은 지난해 9월부터 스토리텔링 작가 7명에게 임대 보조금 명목으로 매달 15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일부 주민은 고시촌 슬럼화를 막기 위해 교육환경을 개선해 정주형(定住形) 마을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이곳에 살던 젊은 부부들이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떠나고 있는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동 삼성초등학교의 경우 2004년엔 학생 수가 1500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400명으로 73%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서울시 전체 초등학생 수는 36% 줄었다.

사회과학서점 ‘그날이오면’의 김동운 대표는 “원룸 등 1인 가구가 너무 많다 보니 위기가 찾아오면 주민들의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며 “주민들과 지자체가 지혜를 모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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