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때 외항선원 남편 만나
4년 전 딸 구하려던 남편 숨져
'일 안하면 살 방법 없겠구나' 생각
강사·번역·배우…억척스럽게 일해
"등 떠밀려 한 정치, 이젠 숙명"
이주민 가정 지원 의정활동에 초점
첫 '외국인 서울시공무원' 타이틀도
"다문화 편견, 시간이 해결해 줄 것"
[ 손성태 / 은정진 기자 ] 그는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국적도 한국인데 아직도 나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반(反)다문화 정서는 점차 엷어지고 있으며,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새누리당이 발표한 비례대표 라인업(명단)은 역대 최강이란 평가를 받았다. 사회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새누리당 비례대표 라인업의 ‘화룡점정’은 이주여성을 대표한 이자스민(필리핀명 자스민 바쿠어나이 이 빌라누에바) 의원이었다.
이주민으로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에 오른 이자스민 의원은 “아이러니컬하게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에야 이주민의 편견과 차별을 더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인 등으로 활동할 때 그 많던 호의적인 팬들은 순식간에 ‘안티’팬으로 돌아섰다.
그는 “다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국회의원까지 되는 것에 대한 반감과 다문화가 더 보편화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이자스민 의원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한국여성정치연구소의 ‘이주여성 의원 만들기’ 프로젝트가 계기가 됐다.
17년 단골 칼국수집과의 인연
‘세월호’ 침몰 참사로 전 국민이 비탄에 빠진 지난달 29일 서울 연남동에 있는 ‘김가네칼국수’에서 이자스민 의원을 만났다. 4년 전 외항선원이었던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데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 자녀를 둔 그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다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아들(고등학생)과 딸(중학생)은 TV 사고수습 장면에 눈을 떼지 못한 채 흐느끼는 이자스민 의원에게 “집 떠내려가니 그만 울라”고 타박했단다. 남편 이동호 씨는 2010년 여름 강원도 영월 피서지에서 급류에 휩쓸린 딸을 구하다 자신은 물에 빠져 숨졌다.
그의 단골 음식점인 ‘김가네칼국수’는 고인이 된 남편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1996년 한국에 온 뒤 시댁 근처에 있는 음식점을 남편 따라, 시댁식구들 따라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17년 ‘왕단골’이 됐다.
이자스민 의원을 반갑게 맞은 김이준 사장(45)은 별도 주문을 받지 않고 보쌈과 해물칼국수 세트를 내오게 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음식이 차려지자마자 싱싱한 돼지 보쌈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러곤 양념 무말랭이를 고기에 얹어 한입 가득 시식을 해 보였다.
그는 “필리핀에서는 칼국수를 먹지 않고, 볶음국수나 간장소스를 넣은 국수를 주로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밍밍한 국물맛의 칼국수에 아무 맛을 못 느껴, 몇 년 동안 보쌈만 먹었다고 한다.
남편 및 시댁식구들과 외식만 하면 이곳을 찾는 바람에 이젠 칼국수에도 입맛을 들였다. 많을 때는 1주일에 서너 차례 방문한다. 이자스민 의원은 “이젠 칼국수도 즐겨 먹지만 여전히 다른 집 칼국수는 잘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이 음식점과의 묘한 인연도 소개했다. 그는 2010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차린 남편 빈소에서 당시 사장이었던 이연기 할머니(80)와 마주쳤다. 같은 날 남편을 떠나보낸 할머니도 옆방에 빈소를 차린 것이다. “이국천리 인연을 찾아온 남편이 떠나면서 단골 음식점에까지 질긴 인연을 남겼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둘은 주인과 고객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얘기 도중 옆을 지나치는 할머니에게 “괜찮으세요? 무릎 수술하셨다면서요?”라고 살갑게 물었다.
17세 필리핀 소녀의 사랑
외항선원이었던 남편은 1994년 필리핀을 찾았다. 여러 차례 오고 간 것이 아니라 이 때 방문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남편 이씨는 당시 부친이 운영하던 편의점 가게를 잠시 맡아보던 17세 소녀 자스민 바쿠어나이에게 한눈에 반했다. 한국과 학제가 달라 자스민은 대학 1년생이었다.(필리핀은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과정 없이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이때부터 29세 한국 청년의 끈질긴 구애가 시작됐다. 남편은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2주 동안 자스민 주위를 맴돌다가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수개월 반복했다. 필리핀 무비자 거주 기간이 15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필리핀 소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릴 때쯤 남편은 큰 옷가방만 싸들고 오더니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더라도 결혼해줄 때까지 안 떠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남편은 결혼 뒤 필리핀에서 같이 살면서 학업을 마치게 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양가 부모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남편은 종갓집 장손인 데다 자스민 부친도 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필리핀은 조혼이 일상적이어서 18세가 되면 양친 중 한 명의 동의만으로 결혼이 가능하다는 게 이자스민 의원의 설명이다. 다행히 모친은 자스민 편을 들어줬다.
이자스민 의원은 “나라와 직장까지 버리고, 불법체류자 신분도 마다치 않은 채 나 하나 바라보고 결혼하자는 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느냐”고 회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에서 치른 둘의 결혼식에는 시댁식구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 뒤 임신을 했고, “아이는 한국에서 낳아야 한다”는 남편의 고집을 꺾지 못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잠깐 다녀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동안 최대한 여기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했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났고, 그러는 사이 적응이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처음엔 한국 음식들이 풍겨내는 ‘냄새’가 가장 큰 곤욕이었다. 그는 “한국 사람은 못 느끼지만 간장 된장 고추장은 그 자체로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이런 냄새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먹는 음식을 따로 포장해 냉장고에 넣어놔도 금세 냄새가 배었다. 하지만 종갓집 며느리로 그 많은 제사와 가족행사를 하다보니 이젠 직접 된장을 담글 정도가 됐다. 1999년에 한국 국적을 얻었다. 그는 현재 연희동에서 시댁부모는 물론 시동생 부부·조카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다문화 가정 지원 ‘컨트롤타워’ 없어”
이자스민 의원은 국회의원을 비롯해 외국인 서울시 공무원 등 ‘최초 타이틀’을 몇 개 보유하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시댁 살림에 보탬이 될까 여러 직업을 전전하기도 했다. 영어, 한국어 강사에서 필리핀어 번역, 영화배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한 방송사 주부가요열창을 계기로 방송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엔 영화 ‘완득이’에서 꽤 비중 높은 조연도 맡았다. 남편이 갑자기 별세한 뒤 더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방송 출연이나 번역 등으로 고정수입이 없던 그는 동사무소에 다문화 가정에 대한 지원을 문의한 적이 있다. 당시엔 다문화 가정에 대한 별도 지원이 없고, 한부모 가정에 대한 10여만원 지원이 전부였다. 그는 “일을 안 하면 살 방법이 없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는 다문화 가정 및 소외가정 지원에 의정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비례의원 한 명으로서 역부족을 느낄 때가 많다. 다문화 가정 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지원할 마땅한 ‘컨트롤타워’ 역할의 부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총리실 산하에 다문화가정정책위원회, 외국인 정책 위원회, 외국인 노동자 정책위원회 등 3개 조직이 흩어져 있다”며 “이들을 한데 합쳐 효율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남편 빈소를 찾은 지인들이 무심코 “필리핀에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어 큰 충격을 받았다. 별 악의 없이 한 말들이지만, 이주민에 대한 기본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국적도 한국인데 아직도 나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반(反)다문화 정서는 점차 엷어지고 있으며,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김연아 김태환 선수와 같이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국익에 보탬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 편견이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국회 의정활동에 보람과 책임감을 느낀다는 그는 “너무 바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등 떠밀리듯이 정치를 하게 됐는데, 요즘 들어 숙명처럼 느낄 때가 많다”며 “임기를 채운 뒤 어찌 될지 모르지만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제2의 이자스민’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하지 못해서 길이 막혔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을 맺었다.
대한민국 입법대상…정치인 베스트 드레서상…남다른 ‘존재감’ 과시
이자스민 의원은 지난해 12월 ‘정치인 베스트 드레서상’과 ‘대한민국 입법대상’을 각각 수상했다. 전혀 다른 영역의 2개 부문 수상은 필리핀 출신, 초선 비례대표 의원의 ‘존재감’을 확인해 줬다는 평가다.
입법대상을 받은 법안은 이자스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단순 경쟁률 80 대 1 이상을 뚫은 수상이다.
이자스민 의원 단골집 ‘김가네 칼국수’ 바지락·건새우로 국물 우려낸 해물칼국수 ‘일품’
이자스민 의원이 자주 찾는 서울 연남동 ‘김가네 칼국수’는 1997년부터 해물칼국수와 보쌈만을 전문으로 해온 식당이다. 메인 메뉴인 해물칼국수는 조미료 대신 바지락과 건새우, 황태포로 국물을 우려내 끝 맛이 시원하다.
또 다른 인기 메뉴인 낙지해물칼국수는 큼직한 산낙지 한 마리와 꽃게, 홍합이 푸짐하게 담겨 나와 식감을 자극한다.
이 의원이 추천하는 메뉴는 ‘돼지고기 보쌈’. 국내산 목살로 삶은 보쌈은 살코기와 비계가 적당한 비율로 섞여 있어 느끼하지 않다. 매콤한 무말랭이 양념이나 시원한 맛을 낸 백김치, 멸치젓으로 직접 담근 배추 겉절이 중 입맛에 맞게 골라 싸먹을 수 있다.
해물칼국수는 1인분 7000원, 낙지해물칼국수는 1인분 8000원, 보쌈은 소(小)사이즈가 2만3000원, 대(大)사이즈는 3만원이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오후 10시. (02)332-1809
손성태/은정진 기자 mrhand@hankyung.com
4년 전 딸 구하려던 남편 숨져
'일 안하면 살 방법 없겠구나' 생각
강사·번역·배우…억척스럽게 일해
"등 떠밀려 한 정치, 이젠 숙명"
이주민 가정 지원 의정활동에 초점
첫 '외국인 서울시공무원' 타이틀도
"다문화 편견, 시간이 해결해 줄 것"
[ 손성태 / 은정진 기자 ] 그는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국적도 한국인데 아직도 나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반(反)다문화 정서는 점차 엷어지고 있으며,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새누리당이 발표한 비례대표 라인업(명단)은 역대 최강이란 평가를 받았다. 사회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새누리당 비례대표 라인업의 ‘화룡점정’은 이주여성을 대표한 이자스민(필리핀명 자스민 바쿠어나이 이 빌라누에바) 의원이었다.
이주민으로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에 오른 이자스민 의원은 “아이러니컬하게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에야 이주민의 편견과 차별을 더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인 등으로 활동할 때 그 많던 호의적인 팬들은 순식간에 ‘안티’팬으로 돌아섰다.
그는 “다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국회의원까지 되는 것에 대한 반감과 다문화가 더 보편화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이자스민 의원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한국여성정치연구소의 ‘이주여성 의원 만들기’ 프로젝트가 계기가 됐다.
17년 단골 칼국수집과의 인연
‘세월호’ 침몰 참사로 전 국민이 비탄에 빠진 지난달 29일 서울 연남동에 있는 ‘김가네칼국수’에서 이자스민 의원을 만났다. 4년 전 외항선원이었던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데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 자녀를 둔 그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다시 느끼고 있다고 했다.
아들(고등학생)과 딸(중학생)은 TV 사고수습 장면에 눈을 떼지 못한 채 흐느끼는 이자스민 의원에게 “집 떠내려가니 그만 울라”고 타박했단다. 남편 이동호 씨는 2010년 여름 강원도 영월 피서지에서 급류에 휩쓸린 딸을 구하다 자신은 물에 빠져 숨졌다.
그의 단골 음식점인 ‘김가네칼국수’는 고인이 된 남편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1996년 한국에 온 뒤 시댁 근처에 있는 음식점을 남편 따라, 시댁식구들 따라 드나들다 보니 어느새 17년 ‘왕단골’이 됐다.
이자스민 의원을 반갑게 맞은 김이준 사장(45)은 별도 주문을 받지 않고 보쌈과 해물칼국수 세트를 내오게 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음식이 차려지자마자 싱싱한 돼지 보쌈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러곤 양념 무말랭이를 고기에 얹어 한입 가득 시식을 해 보였다.
그는 “필리핀에서는 칼국수를 먹지 않고, 볶음국수나 간장소스를 넣은 국수를 주로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밍밍한 국물맛의 칼국수에 아무 맛을 못 느껴, 몇 년 동안 보쌈만 먹었다고 한다.
남편 및 시댁식구들과 외식만 하면 이곳을 찾는 바람에 이젠 칼국수에도 입맛을 들였다. 많을 때는 1주일에 서너 차례 방문한다. 이자스민 의원은 “이젠 칼국수도 즐겨 먹지만 여전히 다른 집 칼국수는 잘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이 음식점과의 묘한 인연도 소개했다. 그는 2010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차린 남편 빈소에서 당시 사장이었던 이연기 할머니(80)와 마주쳤다. 같은 날 남편을 떠나보낸 할머니도 옆방에 빈소를 차린 것이다. “이국천리 인연을 찾아온 남편이 떠나면서 단골 음식점에까지 질긴 인연을 남겼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둘은 주인과 고객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얘기 도중 옆을 지나치는 할머니에게 “괜찮으세요? 무릎 수술하셨다면서요?”라고 살갑게 물었다.
17세 필리핀 소녀의 사랑
외항선원이었던 남편은 1994년 필리핀을 찾았다. 여러 차례 오고 간 것이 아니라 이 때 방문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남편 이씨는 당시 부친이 운영하던 편의점 가게를 잠시 맡아보던 17세 소녀 자스민 바쿠어나이에게 한눈에 반했다. 한국과 학제가 달라 자스민은 대학 1년생이었다.(필리핀은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과정 없이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이때부터 29세 한국 청년의 끈질긴 구애가 시작됐다. 남편은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2주 동안 자스민 주위를 맴돌다가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수개월 반복했다. 필리핀 무비자 거주 기간이 15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필리핀 소녀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릴 때쯤 남편은 큰 옷가방만 싸들고 오더니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더라도 결혼해줄 때까지 안 떠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남편은 결혼 뒤 필리핀에서 같이 살면서 학업을 마치게 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
양가 부모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남편은 종갓집 장손인 데다 자스민 부친도 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필리핀은 조혼이 일상적이어서 18세가 되면 양친 중 한 명의 동의만으로 결혼이 가능하다는 게 이자스민 의원의 설명이다. 다행히 모친은 자스민 편을 들어줬다.
이자스민 의원은 “나라와 직장까지 버리고, 불법체류자 신분도 마다치 않은 채 나 하나 바라보고 결혼하자는 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느냐”고 회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필리핀에서 치른 둘의 결혼식에는 시댁식구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 뒤 임신을 했고, “아이는 한국에서 낳아야 한다”는 남편의 고집을 꺾지 못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잠깐 다녀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동안 최대한 여기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했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났고, 그러는 사이 적응이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처음엔 한국 음식들이 풍겨내는 ‘냄새’가 가장 큰 곤욕이었다. 그는 “한국 사람은 못 느끼지만 간장 된장 고추장은 그 자체로 특유의 냄새를 풍기고, 이런 냄새들이 집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먹는 음식을 따로 포장해 냉장고에 넣어놔도 금세 냄새가 배었다. 하지만 종갓집 며느리로 그 많은 제사와 가족행사를 하다보니 이젠 직접 된장을 담글 정도가 됐다. 1999년에 한국 국적을 얻었다. 그는 현재 연희동에서 시댁부모는 물론 시동생 부부·조카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다문화 가정 지원 ‘컨트롤타워’ 없어”
이자스민 의원은 국회의원을 비롯해 외국인 서울시 공무원 등 ‘최초 타이틀’을 몇 개 보유하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시댁 살림에 보탬이 될까 여러 직업을 전전하기도 했다. 영어, 한국어 강사에서 필리핀어 번역, 영화배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한 방송사 주부가요열창을 계기로 방송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엔 영화 ‘완득이’에서 꽤 비중 높은 조연도 맡았다. 남편이 갑자기 별세한 뒤 더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방송 출연이나 번역 등으로 고정수입이 없던 그는 동사무소에 다문화 가정에 대한 지원을 문의한 적이 있다. 당시엔 다문화 가정에 대한 별도 지원이 없고, 한부모 가정에 대한 10여만원 지원이 전부였다. 그는 “일을 안 하면 살 방법이 없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그는 다문화 가정 및 소외가정 지원에 의정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비례의원 한 명으로서 역부족을 느낄 때가 많다. 다문화 가정 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지원할 마땅한 ‘컨트롤타워’ 역할의 부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총리실 산하에 다문화가정정책위원회, 외국인 정책 위원회, 외국인 노동자 정책위원회 등 3개 조직이 흩어져 있다”며 “이들을 한데 합쳐 효율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남편 빈소를 찾은 지인들이 무심코 “필리핀에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어 큰 충격을 받았다. 별 악의 없이 한 말들이지만, 이주민에 대한 기본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국적도 한국인데 아직도 나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반(反)다문화 정서는 점차 엷어지고 있으며,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김연아 김태환 선수와 같이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국익에 보탬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 편견이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국회 의정활동에 보람과 책임감을 느낀다는 그는 “너무 바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등 떠밀리듯이 정치를 하게 됐는데, 요즘 들어 숙명처럼 느낄 때가 많다”며 “임기를 채운 뒤 어찌 될지 모르지만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자스민 의원은 “‘제2의 이자스민’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하지 못해서 길이 막혔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을 맺었다.
대한민국 입법대상…정치인 베스트 드레서상…남다른 ‘존재감’ 과시
이자스민 의원은 지난해 12월 ‘정치인 베스트 드레서상’과 ‘대한민국 입법대상’을 각각 수상했다. 전혀 다른 영역의 2개 부문 수상은 필리핀 출신, 초선 비례대표 의원의 ‘존재감’을 확인해 줬다는 평가다.
입법대상을 받은 법안은 이자스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단순 경쟁률 80 대 1 이상을 뚫은 수상이다.
이자스민 의원 단골집 ‘김가네 칼국수’ 바지락·건새우로 국물 우려낸 해물칼국수 ‘일품’
이자스민 의원이 자주 찾는 서울 연남동 ‘김가네 칼국수’는 1997년부터 해물칼국수와 보쌈만을 전문으로 해온 식당이다. 메인 메뉴인 해물칼국수는 조미료 대신 바지락과 건새우, 황태포로 국물을 우려내 끝 맛이 시원하다.
또 다른 인기 메뉴인 낙지해물칼국수는 큼직한 산낙지 한 마리와 꽃게, 홍합이 푸짐하게 담겨 나와 식감을 자극한다.
이 의원이 추천하는 메뉴는 ‘돼지고기 보쌈’. 국내산 목살로 삶은 보쌈은 살코기와 비계가 적당한 비율로 섞여 있어 느끼하지 않다. 매콤한 무말랭이 양념이나 시원한 맛을 낸 백김치, 멸치젓으로 직접 담근 배추 겉절이 중 입맛에 맞게 골라 싸먹을 수 있다.
해물칼국수는 1인분 7000원, 낙지해물칼국수는 1인분 8000원, 보쌈은 소(小)사이즈가 2만3000원, 대(大)사이즈는 3만원이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오후 10시. (02)332-1809
손성태/은정진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