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 타깃 삼던 행동주의, 시가총액 100억弗 기업도 공격
"주가에 도움" 기관투자가들 표 대결 시 행동주의 지지
경영진 위협 후 비싸게 되팔아…'단기차익 노린 투기꾼' 비판도
[ 뉴욕=유창재 기자 ] 앤디 워홀 애호가인 대니얼 롭은 미술품시장의 큰손이다. 자연히 미술품 경매회사 소더비에는 최우수 고객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객이 적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 서드포인트의 최고경영자(CEO)인 롭은 작년 10월 소더비 지분을 9.7%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뒤 “소더비는 오래된 명작이지만 복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윌리엄 루프레흐트 CEO의 사임을 요구했다. 7개월간의 싸움 끝에 양측은 지난 5일 롭을 포함한 서드포인트 측 인사 3명을 소더비 이사회에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6일로 예정된 주주총회 표 대결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글로벌 대기업까지 타깃으로
공격적인 경영진 압박으로 유명한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세지고 있다. 270년 전통의 경매회사 소더비를 포함해 표 대결도 벌여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연기금, 뮤추얼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이 행동주의 펀드의 손을 들어주고 있어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타깃은 주로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들의 투자가 날로 담대해지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글로벌 대기업을 공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 아이칸엔터프라이즈 회장은 2012년 넷플릭스, 지난해 애플에 이어 올초에는 이베이를 공격했다. 최근 소더비 이사회에 진입한 롭 CEO는 2012년 야후에 투자해 스콧 톰슨 전 CEO를 몰아냈다. 작년에는 일본 소니 지분을 취득해 소니엔터테인먼트의 분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도 2012년 다국적 생활용품 회사 프록터앤드갬블(P&G)에 투자한 데 이어 작년에는 미국 정부가 보유한 대형 모기지 회사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지분을 사들였다.
맥킨지가 3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타깃이 됐던 미국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평균 100억달러에 달했다. 2009년까지만 해도 20억달러에 불과했지만 2012년 80억달러를 기록하는 등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기관투자가 지지 업고 이사회 장악
아이칸 회장이 지난해 8월 총 30억달러를 투자해 사들인 애플 주식은 550만주. 그는 1%에도 못 미치는 지분을 갖고 애플에 자사주를 더 사들일 것을 요구해왔다. 팀 쿡 애플 CEO는 아이칸 회장을 따로 만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서 뉴욕으로 날아가야 했다. 애플은 결국 지난달 자사주 추가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적은 지분으로도 대기업 경영진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서 헤지펀드의 손을 들어주는 사례가 늘었다. 캘리포니아주 교사퇴직연금(CalSTRS)은 아예 지난해 행동주의 헤지펀드 휘트워스와 손잡고 제조 전문회사 팀켄의 사업 분할을 요구하기도 했다.
기관투자가의 지원을 받다보니 행동주의 펀드들은 손쉽게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표 대결에서 패배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기업들이 순순히 이사 자리를 내주면서다.
팩트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표 대결을 거치지 않고 이사회에 진입한 행동주의 투자 건수는 72건으로 2012년 66건에 비해 9% 늘었다. 51건에 불과했던 2011년에 비해서는 41%나 증가했다.
행동주의 투자가 기업 가치 높인다?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우군을 얻고 있는 건 이들의 투자가 기업가치를 높인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실제 맥킨지의 분석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가 투자한 기업들의 시세차익과 배당금을 더한 총 주주 수익률은 투자 전보다 높아져 3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과거 적으로만 여기던 행동주의 투자자를 환영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구조조정과 기업가치 증대를 위한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서다. 늘어난 영향력에 행동주의 투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2011년 179건이던 미국 내 행동주의 투자 건수는 2012년 209건에 이어 지난해에는 220건으로 늘었다.
행동주의 펀드 자체의 수익률도 높아졌다. 대체투자시장 조사회사인 프레킨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수익률은 17.52%로 전체 헤지펀드 수익률 11.17%를 크게 웃돌았다. 행동주의 펀드들의 총 자산운용액도 최근 사상 최대 규모인 914억달러로 불어났다.
단기이익 집착하는 투기세력 비판도
하지만 행동주의 펀드는 역시 단기 이익만 추구하는 투기세력이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에 차익을 실현하는 것이 더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가 보유한 지분을 시가보다 비싸게 울며 겨자 먹기로 되사주는 이른바 ‘그린메일’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야후는 롭 CEO가 보유지분 6%를 처분하는 과정에서 3.7%를 매입해줬다. 게임회사 테이크투인터랙티브도 지난해 아이칸 회장의 보유지분 12.9%를 자사주 매입의 일환으로 사들였다. 일반 주주들은 기대도 할 수 없는 혜택이어서 불공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월스트리트 내에서도 행동주의 투자자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채권왕’ 빌 그로스 핌코 최고투자책임자는 작년 10월 “칼 아이칸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애플을 내버려두고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고 비판했다.
■ 행동주의 투자
activist investment. 지배구조가 좋지 않거나 경영상의 비효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 투자해 일정 수준의 의결권을 확보한 뒤 사업전략 변화나 구조조정, 지배구조 개선 등을 유도해 단기간에 기업가치를 높여 수익을 올리는 투자 행태를 뜻한다. 기업가치가 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인 경영 개입을 통해 이를 실현시킨다는 의미에서 행동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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