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지점장 양복 벗고 '작업복' 이만호 씨
기술 만이 살 길이다
54세에 국민은행 명예퇴직
2년간 계약직 감사 일하며 야간 직업학교서 '주경야독'
보일러기능사 자격증 취득
기부·독거노인 집수리도
"퇴직후 한동안 막막했지만 이제 남은 인생 자신있어
나라·자식에 손 안벌려 행복"
[ 김일규 기자 ]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 지하 4층 기계실. 건물의 보일러, 에어컨 등을 가동하는 기계들이 모인 곳이다. 4년 전만 해도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으며 국민은행 지점장으로 일했던 이만호 씨(58)의 새 일터이기도 하다. 이씨는 2010년 말 명예퇴직 후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보일러기능사를 포함해 7개의 자격증을 따고 지난 3월 국민은행 보일러공으로 재취업했다. 이씨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수십년인데 아무런 직업 없이 수십년간 등산하고, 낚시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며 “나라와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이씨는 “급여도 적고 일이 힘들 때도 많지만 남은 날들이 기대된다”며 활짝 웃었다.
‘대출의 달인’에게 닥친 갑작스런 명예퇴직
2010년 10월 국민은행 언주로지점장으로 일하던 이씨는 명예퇴직 통보를 받았다. 당시 54세였던 그는 은행 경영 악화에 따라 실시한 대대적인 명예퇴직 대상이 됐다. “어차피 정년이 가까워오던 나이라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양보할 수밖에 없었죠.”
이씨는 ‘대출의 달인’으로 불리며 뱅커로서 화려한 과거를 보냈다. 그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온 뒤 동대문상고를 졸업하고 1981년 5월 주택은행에 입행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터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소공동지점을 시작으로 여러 점포를 거치며 주로 대출 분야에서 실력을 쌓았다.
2001년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이 합병하면서 두 은행의 대출 업무를 합치는 작업이 시작됐다. 두 은행의 대출 관련 규정과 상품들이 섞이면서 고객은 물론 직원들의 혼란이 컸다. 그는 통합은행의 서울대출실행센터에서 일하며 전국 지점에서 올라오는 대출 관련 문의를 모아 답변서를 만들어 보내는 일을 맡았다. 대출 업무만 20년을 했던 그가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직원들이 뽑은 최우수직원에 이름을 올렸다.
2007년엔 부산 노포동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5년간 영업실적이 전국 최하위권에 머문 취약 지점이었다. 본사에서는 “6개월 안에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지점을 폐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악착같이 달려들어 지점 등수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공으로 2008년 직원대상을 받았다. 2009년에는 서울로 복귀해 언주로지점장을 맡았다. 그렇게 ‘뭐든 할 수 있겠다’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2010년 10월. 명예퇴직 대상이라는 느닷없는 통보를 받던 날 그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기술만이 살 길’…2년간 주경야독
퇴직 후 한동안은 여행을 다녔다. 여행길에서 80세, 90세까지 정정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아직 너무 긴 인생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함께 퇴
한 동료 지점장들은 “마누라와 하루 세 끼를 꼬박 집에서 같이 먹다 보니 서로 짜증만 부리고 다투는 일이 늘었다”는 하소연을 쏟아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커진 이씨는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은퇴 후 교통비를 아끼려고 자전거를 애용하다 수리차 들른 자전거포 60대 주인의 얘기를 듣고서다. “노후 걱정은 안 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가게 주인은 “자전거 기술 하나로 40년을 일했다. 큰돈은 벌지 못해도 자식 공부, 결혼시키고 최근엔 작은 건물도 샀다. 자식들에게 손 내밀지 않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은행에서 계약직 지점 감사 일을 제의해 와 완전 은퇴까지 약간의 시간을 번 그는 2011년 1월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본 한 장의 벽보에 시선이 꽂혔다. 서울시에서 무상으로 기술교육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기술을 배울까 고민하다 보일러기술을 선택, 한 달 뒤 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현 서울시 동부기술교육원) 보일러과 야간과정에 합격했다. 낮에는 은행 지점 감사로 일하고, 밤에는 기술을 배우는 2년간의 ‘주경야독’이 시작됐다.
30년 동안 책상에 앉아 있던 그에게 새로 시작한 기술 배우기는 고역이었다. 가스용접, 전기용접을 하며 옷을 태우는 일도 잦았고 손이나 발을 다치는 것도 예삿일이 됐다. 같이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참고 견뎠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2011년 6월 보일러기능사 자격을 얻게 됐다.
자격증 7개로 나이 극복…국민은행 다시 출근
“보일러 기술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에어컨기술도 함께 가져야 취업에 유리하고 또 대부분 그런 코스를 밟더군요. 그래서 다시 ‘공조냉동기계기능사’에 도전했습니다.” 역시 실기가 만만치 않아 한 번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해 그해 12월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다음 코스는 ‘에너지관리산업기사’였다. 보일러, 에어컨을 넘어 건물의 에너지를 어떻게 아낄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시험이 1년에 한 번인데 2011년엔 124명이 응시해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따지 못한 자격증인데,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또 도전했다. 7개월을 공부한 끝에 2012년 합격 커트라인 60점을 딱 채우며 통과했다. 합격자는 그를 포함해 4명이었다.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본격적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판판이 젊은 사람들에게 밀렸다. 이력서만 220군데를 냈지만 다 떨어졌다. 그는 다시 책을 잡았다. 기술로 나이를 극복하겠다는 각오로 취업시장이 더 넓은 ‘전기 기술’에 도전했다. 동영상 강의와 기술학교 수업을 들으며 공부한 끝에 2012년 12월 전기기능사를 취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자격증 모으기’는 작년까지 지속됐다. 가스안전관리자, 위험물안전관리자,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도 땄다. 3년간 모은 자격증만 7개가 됐다.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하다 올 2월 국민은행 본점 시설관리를 위한 파견직원을 찾는 한 용역회사의 광고를 접했다. 지점장까지 지낸 은행에서 다시 하급직으로 일하는 데 대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남다른 노력으로 성과를 얻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다.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내고 합격해 3월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퇴직 후 막막했지만 이젠 남은 인생 자신”
그는 12명의 동료와 함께 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기계실에서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일한다. 월급은 130만원이다. 한때 1억6000만원이었던 연봉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꼭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어서다. “개인연금으로 매달 220만원씩 받고 있고 몇 년 뒤부터는 국민연금도 나옵니다. 집도 있고, 자식 둘은 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요. 부동산과 예금 등도 꽤 됩니다. 그래서 월급의 절반인 60만원은 적금에 넣고 나머지는 기부합니다.”
같이 퇴직한 지점장들은 술 먹고, 등산 가는 게 일인데 그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90세까지 산다고 하면 30년을 놀아야 하는데 뭘 하면서 노나요?”
그는 지금도 새로운 자격증인 전기산업기사에 도전 중이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기술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독거노인들의 집 수리 봉사활동을 한다.
기술을 배워 재취업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는 과거의 영광은 잊고 눈높이를 낮출 것을 주문했다. 또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은행에서 지점장까지 하던 사람이 겨우 보일러공이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배운 기술로 건물에 있는 직원들이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남은 인생 자신 있습니다.”
○이만호 씨가 은퇴 후 취득한 자격증
보일러기능사
공조냉동기계기능사
에너지관리산업기사
전기기능사
가스안전관리자
위험물안전관리자
소방안전관리자
무상 직업교육, 배울 곳 많이 있어요
이만호 씨처럼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직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관은 찾아보면 꽤 있다.
대 표적인 곳이 한국폴리텍대학이다. 한국폴리텍대학은 만 45세 이상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 자영업자 등을 대상으로 ‘베이비부머 훈련’ 교육생을 모집한다. 모집 인원은 총 1370명이다. 지원과정에 따라 모집기간이 달라 홈페이지(ipsi.kopo.ac.kr)에서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지원하면 된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과정은 △보일러 시공 △공조 냉동기계 △건축 목공 △전기 △도배 △인터넷 쇼핑몰 △전자기기 △특수용접 △자동화기기 △항공기계 등으로 다양하다. 교육기간은 2~5개월이며 비용 전액은 정부가 지원한다. 전국 34개 캠퍼스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 수료생 중 46.8%가 취업에 성공했다.
서울시는 동부, 중부, 남부, 북부 등 4개의 기술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동부기술교육원이 이씨가 수료한 곳이다. 주간과정과 야간과정이 있어 선택할 수 있다. 건축디자인, 산업설비, 자동차, 전기전자 등과 관련한 일을 배울 수 있으며 주간은 1년, 야간은 6개월 과정이다. 매년 두 차례, 1~2월과 7~8월에 교육생을 모집한다. 서울시민만 지원할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전국 8개(부산 인천 광주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인력개발원에서 기술·기능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전기, 전자, 자동제어, 건축, 가구디자인, 금형, 정보통신 등의 분야다. 만 29세 이하만 다닐 수 있다. 교육비는 전액 국비로 지원한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기술 만이 살 길이다
54세에 국민은행 명예퇴직
2년간 계약직 감사 일하며 야간 직업학교서 '주경야독'
보일러기능사 자격증 취득
기부·독거노인 집수리도
"퇴직후 한동안 막막했지만 이제 남은 인생 자신있어
나라·자식에 손 안벌려 행복"
[ 김일규 기자 ]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 지하 4층 기계실. 건물의 보일러, 에어컨 등을 가동하는 기계들이 모인 곳이다. 4년 전만 해도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으며 국민은행 지점장으로 일했던 이만호 씨(58)의 새 일터이기도 하다. 이씨는 2010년 말 명예퇴직 후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보일러기능사를 포함해 7개의 자격증을 따고 지난 3월 국민은행 보일러공으로 재취업했다. 이씨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수십년인데 아무런 직업 없이 수십년간 등산하고, 낚시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며 “나라와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이씨는 “급여도 적고 일이 힘들 때도 많지만 남은 날들이 기대된다”며 활짝 웃었다.
‘대출의 달인’에게 닥친 갑작스런 명예퇴직
2010년 10월 국민은행 언주로지점장으로 일하던 이씨는 명예퇴직 통보를 받았다. 당시 54세였던 그는 은행 경영 악화에 따라 실시한 대대적인 명예퇴직 대상이 됐다. “어차피 정년이 가까워오던 나이라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양보할 수밖에 없었죠.”
이씨는 ‘대출의 달인’으로 불리며 뱅커로서 화려한 과거를 보냈다. 그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온 뒤 동대문상고를 졸업하고 1981년 5월 주택은행에 입행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터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소공동지점을 시작으로 여러 점포를 거치며 주로 대출 분야에서 실력을 쌓았다.
2001년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이 합병하면서 두 은행의 대출 업무를 합치는 작업이 시작됐다. 두 은행의 대출 관련 규정과 상품들이 섞이면서 고객은 물론 직원들의 혼란이 컸다. 그는 통합은행의 서울대출실행센터에서 일하며 전국 지점에서 올라오는 대출 관련 문의를 모아 답변서를 만들어 보내는 일을 맡았다. 대출 업무만 20년을 했던 그가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직원들이 뽑은 최우수직원에 이름을 올렸다.
2007년엔 부산 노포동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5년간 영업실적이 전국 최하위권에 머문 취약 지점이었다. 본사에서는 “6개월 안에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지점을 폐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악착같이 달려들어 지점 등수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공으로 2008년 직원대상을 받았다. 2009년에는 서울로 복귀해 언주로지점장을 맡았다. 그렇게 ‘뭐든 할 수 있겠다’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2010년 10월. 명예퇴직 대상이라는 느닷없는 통보를 받던 날 그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기술만이 살 길’…2년간 주경야독
퇴직 후 한동안은 여행을 다녔다. 여행길에서 80세, 90세까지 정정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아직 너무 긴 인생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함께 퇴
한 동료 지점장들은 “마누라와 하루 세 끼를 꼬박 집에서 같이 먹다 보니 서로 짜증만 부리고 다투는 일이 늘었다”는 하소연을 쏟아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커진 이씨는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은퇴 후 교통비를 아끼려고 자전거를 애용하다 수리차 들른 자전거포 60대 주인의 얘기를 듣고서다. “노후 걱정은 안 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가게 주인은 “자전거 기술 하나로 40년을 일했다. 큰돈은 벌지 못해도 자식 공부, 결혼시키고 최근엔 작은 건물도 샀다. 자식들에게 손 내밀지 않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은행에서 계약직 지점 감사 일을 제의해 와 완전 은퇴까지 약간의 시간을 번 그는 2011년 1월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본 한 장의 벽보에 시선이 꽂혔다. 서울시에서 무상으로 기술교육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기술을 배울까 고민하다 보일러기술을 선택, 한 달 뒤 서울종합직업전문학교(현 서울시 동부기술교육원) 보일러과 야간과정에 합격했다. 낮에는 은행 지점 감사로 일하고, 밤에는 기술을 배우는 2년간의 ‘주경야독’이 시작됐다.
30년 동안 책상에 앉아 있던 그에게 새로 시작한 기술 배우기는 고역이었다. 가스용접, 전기용접을 하며 옷을 태우는 일도 잦았고 손이나 발을 다치는 것도 예삿일이 됐다. 같이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참고 견뎠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2011년 6월 보일러기능사 자격을 얻게 됐다.
자격증 7개로 나이 극복…국민은행 다시 출근
“보일러 기술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에어컨기술도 함께 가져야 취업에 유리하고 또 대부분 그런 코스를 밟더군요. 그래서 다시 ‘공조냉동기계기능사’에 도전했습니다.” 역시 실기가 만만치 않아 한 번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해 그해 12월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다음 코스는 ‘에너지관리산업기사’였다. 보일러, 에어컨을 넘어 건물의 에너지를 어떻게 아낄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시험이 1년에 한 번인데 2011년엔 124명이 응시해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다. 젊은 사람들도 따지 못한 자격증인데,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또 도전했다. 7개월을 공부한 끝에 2012년 합격 커트라인 60점을 딱 채우며 통과했다. 합격자는 그를 포함해 4명이었다.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본격적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판판이 젊은 사람들에게 밀렸다. 이력서만 220군데를 냈지만 다 떨어졌다. 그는 다시 책을 잡았다. 기술로 나이를 극복하겠다는 각오로 취업시장이 더 넓은 ‘전기 기술’에 도전했다. 동영상 강의와 기술학교 수업을 들으며 공부한 끝에 2012년 12월 전기기능사를 취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자격증 모으기’는 작년까지 지속됐다. 가스안전관리자, 위험물안전관리자,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도 땄다. 3년간 모은 자격증만 7개가 됐다.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하다 올 2월 국민은행 본점 시설관리를 위한 파견직원을 찾는 한 용역회사의 광고를 접했다. 지점장까지 지낸 은행에서 다시 하급직으로 일하는 데 대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남다른 노력으로 성과를 얻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다.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내고 합격해 3월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퇴직 후 막막했지만 이젠 남은 인생 자신”
그는 12명의 동료와 함께 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기계실에서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일한다. 월급은 130만원이다. 한때 1억6000만원이었던 연봉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꼭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어서다. “개인연금으로 매달 220만원씩 받고 있고 몇 년 뒤부터는 국민연금도 나옵니다. 집도 있고, 자식 둘은 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지요. 부동산과 예금 등도 꽤 됩니다. 그래서 월급의 절반인 60만원은 적금에 넣고 나머지는 기부합니다.”
같이 퇴직한 지점장들은 술 먹고, 등산 가는 게 일인데 그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90세까지 산다고 하면 30년을 놀아야 하는데 뭘 하면서 노나요?”
그는 지금도 새로운 자격증인 전기산업기사에 도전 중이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기술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독거노인들의 집 수리 봉사활동을 한다.
기술을 배워 재취업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는 과거의 영광은 잊고 눈높이를 낮출 것을 주문했다. 또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은행에서 지점장까지 하던 사람이 겨우 보일러공이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배운 기술로 건물에 있는 직원들이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남은 인생 자신 있습니다.”
○이만호 씨가 은퇴 후 취득한 자격증
보일러기능사
공조냉동기계기능사
에너지관리산업기사
전기기능사
가스안전관리자
위험물안전관리자
소방안전관리자
무상 직업교육, 배울 곳 많이 있어요
이만호 씨처럼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직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관은 찾아보면 꽤 있다.
대 표적인 곳이 한국폴리텍대학이다. 한국폴리텍대학은 만 45세 이상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 자영업자 등을 대상으로 ‘베이비부머 훈련’ 교육생을 모집한다. 모집 인원은 총 1370명이다. 지원과정에 따라 모집기간이 달라 홈페이지(ipsi.kopo.ac.kr)에서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지원하면 된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과정은 △보일러 시공 △공조 냉동기계 △건축 목공 △전기 △도배 △인터넷 쇼핑몰 △전자기기 △특수용접 △자동화기기 △항공기계 등으로 다양하다. 교육기간은 2~5개월이며 비용 전액은 정부가 지원한다. 전국 34개 캠퍼스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 수료생 중 46.8%가 취업에 성공했다.
서울시는 동부, 중부, 남부, 북부 등 4개의 기술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동부기술교육원이 이씨가 수료한 곳이다. 주간과정과 야간과정이 있어 선택할 수 있다. 건축디자인, 산업설비, 자동차, 전기전자 등과 관련한 일을 배울 수 있으며 주간은 1년, 야간은 6개월 과정이다. 매년 두 차례, 1~2월과 7~8월에 교육생을 모집한다. 서울시민만 지원할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전국 8개(부산 인천 광주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인력개발원에서 기술·기능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전기, 전자, 자동제어, 건축, 가구디자인, 금형, 정보통신 등의 분야다. 만 29세 이하만 다닐 수 있다. 교육비는 전액 국비로 지원한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