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달러 받던 잘 나가던 복서
주식시장 대폭락으로 부두 노동자 전락
1933년 뉴딜정책 시작…테네시강 유역 공사
불황의 끝 보이고 복서도 돌아오는데…
[ 강영연 기자 ]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신데렐라 맨’ 을 통해 본 대공황
“참담한 땅에 브래독의 복귀는 모든 미국인의 희망이 됐다. 생을 포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새 영웅에게서 삶의 용기를 되찾았다. 그는 진정한 신데렐라 맨이다.”
잘나가는 라이트 헤비급 복서 짐 브래독(러셀 크로 분)은 사랑스러운 아내 매 브래독(러네이 젤위거 분), 귀여운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한 경기에 3000달러가 넘는 파이트 머니를 받으면서 뉴저지의 단독주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9년 7월18일 토미 라우랜에게 패한 뒤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대공황이 발발했다. 그동안 번 돈을 뉴욕 택시회사 주식에 투자했던 브래독은 주가 폭락으로 빈털터리가 됐다.
잇단 패배와 부상으로 더 이상 링에 설 수도 없게 된 그는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했다. 2005년 개봉한 ‘신데렐라맨’은 전대미문의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던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선사한 한 헝그리 복서의 실존 스토리를 그린 영화다.
뉴욕타임스의 오판
전통 경제학은 인구와 자본이 늘어나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생산량이 늘고 경제가 성장한다고 여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경제가 큰 부침 없이 꾸준히 성장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단기적인 변동은 불가피하다.
일반적으로 경기는 <그래프1>에서처럼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추세선을 중심으로 확장-후퇴-수축-회복의 네 단계를 거친다. 이 같은 경기순환에서 대공황은 수축국면의 불황이 극단적으로 심화된 것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돼 1938년까지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다.
당시 대공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는 1929년 1월1일자 사설에서 “미국은 지난 12개월 동안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과거에 근거해 미래를 예측한다면 새해는 축복과 희망의 해가 될 것”이라고 썼다. 과연 그랬다. 호황이 지속될
이라는 믿음은 미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물가수준은 화폐공급량에 따라 결정된다는 ‘화폐수량설’을 통해 당대 최고 경제학자의 반열에 오른 예일대의 어빙 피셔 교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대공황이 들이닥치기 직전까지도 “미국경제는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주가도 계속 오를 것”(→어빙 피셔의 빗나간 호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의 중심국가로 올라선, 맹렬한 성장세를 구가해온 호황의 끝자락에 엄청난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피셔도, 브래독도 몰랐다.
실업률 3%→37%
먼저 주식시장이 우지끈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렸다. 대공황 직전인 1929년 10월의 미국 주가지수는 1921년에 비해 400%나 치솟은 상태였다. 경기 확장으로 기업은 높은 이윤을 냈고 근로자들의 소득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 돈들이 끊임없이 증권시장으로 밀려들면서 저마다 주식 투자에 열을 올렸다. 1929년 10월24일 1차 폭락이 이뤄졌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10월29일 말 그대로 무차별적 투매행렬이 이어지면서 주식시장은 완전히 붕괴됐다. 불과 열흘여 만에 시가총액 300억달러가 공중으로 사라졌다. 미국 정부가 1차 대전 때 쏟아부은 전쟁 예산과 같은 금액이었다. 이 시기 피셔 교수가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자랑하며 운영하던 기업도 파산행렬에 내몰렸다.
그도 브래독처럼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주식시장에서의 재앙은 실물부문에도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총수요가 현저하게 감소한 가운데 소비심리와 투자심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실업률은 기록적으로 치솟았다. 1929년 3%에 머물던 도시지역 실업률은 1933년 37%로 급등했다.
영화 속에서 브래독은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전전했지만 아주 운좋은 날이 아니면 공을 치기 일쑤였다. 공과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전기와 수도가 끊어졌다. 브래독 부부는 한겨울 냉방에서 감기 걸린 자녀들을 끌어안은 채 절망감을 곱씹어야 했다.
뉴딜정책과 케인스의 만남
하지만 살인적인 불황에도 끝은 있는 법. 1933년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으로 경제 재건에 나섰다. 그는 불황 탈출을 위해선 우선적으로 총수요를 살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비가 살아나지 않으면 기업들은 투자할 수 없고 고용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 루스벨트는 정부가 직접 수요를 늘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뉴딜정책은 유효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해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등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주장을 충실히 따랐다. 케인스는 정부의 재정지출 증대가 그 지출보다 더 큰 경제적 효과를 창출한다는 ‘승수효과’를강조했다. 그리하여 1933년 테네시강 유역에서 댐과 발전소를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됐다. 미국 정부는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청년 중 직업이 없는 사람을 모아 나무를 심고, 하천 수질 개선 활동 등을 시켰다. 한 달 급여는 30달러 정도. 10년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200만명에 달했다. 연방임시구제국도 열었다. 시장기능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여건에선 정부가 주도적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는 케인스의 이론은 뉴딜정책의 부분적인 성공과 함께 한동안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일용직을 전전하며 정부의 빈민구제자금에 의지하던 브래독은 다시 링에 오를 기회를 얻는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두 주먹뿐이었다.
헝그리정신으로 무장하고 오랜 부상에서 벗어난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이어간다.
결국 그는 1935년 서른살의 나이로 당시 ‘링의 살인자’로 불렸던 젊은 챔피언, 맥스 베어(크레이그 비에코 분)를 물리치고 챔피언에 등극한다. 브래독은 경기에서 번 돈으로 다시 뉴저지에 집을 살 수 있었고 가족들은 가난과 결핍에서 벗어났다.
강영연 한국경제신문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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