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유착에 대한 처벌만이 아니라
자발적 의지와 동기 돋우는 게 먼저"
이창길 < 세종대 교수·행정학 cklee@sejong.ac.kr >
‘정부는 죽었다. 공교육은 무너졌고, 의료서비스도 붕괴됐다. 경찰서와 교도소는 초만원이고, 지방정부는 파산하고 있다. 공공부채는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정부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1990년대 초 오스본과 개블러가 쓴 유명한 행정개혁 교과서 ‘정부재창조(Reinventing Government)’에 나온 미국정부의 상황이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무기력한 정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모든 책임이 관료사회로 향하면서 질타와 비난이 거세다. 국가 안전조직을 개편하고, 인사시스템을 바꾸고, ‘관피아’를 척결하겠다는 대책이 쏟아진다. 그러나 대부분이 즉흥적이고, 부분적인 처방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재난을 총괄하는 안전행정부를 국가안전처로 바꾼다고 재난에 신속히 대응하고 구조가 잘 될지는 의문이다. 600년 역사의 관료 선발제도인 행정고시를 축소하고 민간인에게 개방하면 정부가 변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다. 퇴직관료들의 취업제한 규정을 강화한다고 민관유착이 사라질 것인가.
행정개혁은 공무원들이 변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우리 공무원들의 공통적인 행태는 ‘침묵’으로 요약할 수 있다. 누구도 적극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중앙부처 고위직은 물론 재난현장의 일선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판단해서 책임지고 행동하지 않는다. TV토론이나 인터뷰에서 본 공무원들은 대부분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앵무새와 같다. 장관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맡고 있는 정책에 대해 카메라 앞에서 솔직하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장관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정치색이 강한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불통장관’이거나,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준 정책을 받아 전달하는 ‘무소신장관’, 또는 축사나 격려사만 하고 다니는 ‘행사장관’들일 뿐이다. 장관들의 수첩에는 청와대만 있고 국민은 없다.
침묵하는 공무원, 침몰하는 정부를 어떻게 개혁할 수 있을까. 부패와 부정, 불법적 유착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처벌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제 정부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우선 중앙집권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명령과 복종, 감시와 통제의 권위적인 시스템은 거둬야 한다. 한 사람이 모든 결정을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다. 청와대에서 각 부처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탁상에서 현장으로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축구 경기 중에 감독의 역할은 전략을 수정하고 선수를 교체하는 일이다. 개별 선수의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선수로 뛰고 있는 공무원의 자발적 의지와 동기를 자극해야 한다. 목표와 가치를 공유해 행동하는 수평적 협업의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불어 공무원의 행태와 문화의 재창조가 필요하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 위에 군림했던 관료들의 역사가 아직 생생히 살아있다. 조직 내부에서 부패와 불의가 목격되더라도 입을 닫고 눈을 감는 현실을 털고 일어서야 한다. 침묵하면서 기득권을 보전하기 위해 줄 대고 아부했던 부끄러운 자화상에 대해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이제 공직사회가 침묵의 카르텔을 벗어던져야 한다. 더 이상 공무원들이 권력의 일방적인 지시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행정악(administrative evil)’이 돼서는 안 된다. 형식적인 규정에 얽매이고 감사를 걱정하며 청와대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들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성난 표정을 두려워하며 준엄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공무원이 필요하다. 공무원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존의 법칙을 바꾸어야 한다.
이창길 < 세종대 교수·행정학 cklee@sejo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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