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고용이 최고 목표였던 1970년대 케인스경제학 시대
세금 늘어나고 물가 치솟아
자동차·청소 노조 연쇄파업…1978년 '불만의 겨울' 발생
자유주의 성향이던 대처
민영화·정부지출 삭감으로 방만했던 공공부문 개혁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경제정책을 지칭하는 대처리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정책을 지배하던 케인스주의와 복지국가 이념을 자유주의 이념으로 바꾸는 혁명적 변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는 ‘완전고용’을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달성해야 할 목표로 인식하는 케인스 경제학의 시대였다. 그 결과 방만한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 국민의 혈세로 지탱하는 비효율적인 공기업과 복지정책은 완전고용을 위한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정책으로 정당화됐다. 집단이기주의에 갇힌 공기업 노조, 예컨대 영국의 석탄노조는 파업을 통해 정권을 갈아치울 정도였다.
케인스는 ‘장기적으론 우리 모두 죽는다’는 말로 단기 실업대책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장기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단기 처방의 부작용은 2차대전 종전 30년이 지난 1970년대에 폭발했다. 83%의 개인소득세 최고세율과 같은 과중한 세금, 이를 통해 지탱하는 낭비적인 공공부문, 15~20%대의 물가상승률, 30%대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벌이는 강성 노조의 파업, 그 결과 나타나는 2%대의 저성장과 두 자릿수에 달하는 실업률 등이 표출됐다. 그런 부작용은 1978년 말에서 1979년 초 자동차, 운수, 병원, 청소 노조의 연대파업으로 시신마저 제때 처리하지 못하는 ‘불만의 겨울’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는 1979년 집권하면서 소위 통화주의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재정안정을 기하는 한편 민영화와 감세, 정부지출 삭감 등을 통해 방만한 공공부문을 개혁하고 노조 민주화와 법·원칙을 통한 대응을 통해 강성 노조를 굴복시켰다. 그 결과 공기업들은 민영화됐고 시장에서 고객 서비스 경쟁을 하면서 세금을 내는 주체로 탈바꿈했다. 대처리즘의 성공은 노동당으로 하여금 당의 강령에서 국유화를 삭제하고 당내 사회주의 골수파를 제거해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으로 환골탈태하게 만들었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대처리즘이 몰고 온 변화는 혁명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행복 추구를 위해 혹은 불안 해소를 위해 물질적 수단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생산과 교환을 위한 경제적 수단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정치적 수단을 통해 남의 것을 탈취하기도 한다. 케인스주의자들에게는 민간기업의 국유화로 정부가 최대 고용주가 되는 것은 문제가 될 게 없다. 이로 인해 나타날 소비자 수요에 반응하지 않고도 혈세로 철밥통을 지킬 수 있는 공공부문의 비대화는 장기적 문제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철밥통을 얻은 사람들은 일종의 정치적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비자와 다른 사람들의 것을 탈취할 기회를 얻는다.
케인스식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자유시장 기치를 올리고, 경제구조 개혁에 나서는 것은 대다수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정치력을 해치는 자살행위다. 보수당 내 소위 ‘무른 사람들(wets)’이 대처 정책에 반대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대처는 근로자들도 ‘불만의 겨울’과 같은 사태에 거부감을 갖고 있고,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려 한다는 점을 활용해 경제정책 방향을 자유시장으로 선회하는 데 성공했다.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법과 원칙에 따른 정책 집행은 시장경제 이론과 이념이 대처 총리 속에 내면화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서왕이라 불리던 아서 스카길 석탄노조 위원장과의 대결에서 10년 전 집권했던 보수당 전임 총리 히스는 노조의 특권 폐지에 집중함으로써 노조원들의 결집된 저항을 초래하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실각했다.
그러나 대처는 우선 노조 지도자의 특권을 폐지하고 노조원들의 권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노조관련법을 개정했다. 파업처럼 노조원들의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반드시 노조원들의 사전 비밀투표를 거치게 하고 기업들이 파업에 따른 피해를 보상받는 민사소송을 활성화시키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와 더불어 석탄산업 종사자들에게 전직과 퇴직의 기회를 넓혀 줘 실직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파업이 능사가 아님을 인식하게 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봐 노조원들은 비밀투표에서 두 번이나 노조 지도부가 원한 파업을 부결시켰고, 불법파업에 따라 법원에 의해 자금을 동결 당하자 악명 높던 석탄노조도 결국 항복을 선언했던 것이다.
대처는 일반 국민과 공기업 노동자들의 자산 소유 기회를 확대하는 소위 ‘대중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적 지혜를 발휘했다. 공공임대주택 임차인들이 그 주택을 시장가격보다 낮게 살 수 있게 해 슬럼화를 막았고,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 기존 경영진이나 노동자들도 주식 매입을 통해 기업을 인수할 기회도 열어놓았다. 이런 정책 덕분에 1983년 민영화 결정 당시 적자를 면치 못하던 영국항공의 경우 기존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민영화되기 전 자체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 수를 5만9000명에서 3만9000명으로 줄였고, 매각시점에는 흑자 기업으로 전환됐다. 대처는 또 의료 교육 등 민영화가 여의치 않을 경우엔 소비자 선택에 따라 공급자들이 영향을 받도록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국내 철도공사 자회사 설립을 둘러싸고 철도노조가 최장기 파업을 벌였다. 정치권으로 공이 넘어간 채 일단락됐지만, 이 문제를 돌파해낼 신념과 정치적 지혜를 갖춘 정치인이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30년 전의 대처리즘이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硏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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