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럼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가 직접 노비를 부려서 경영을 하지 않아도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소작료)를 수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소농경영의 자립성이 강해져 노비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줄어들게 된 것이 노비제가 쇠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양반들의 농장은 노비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부 소작을 주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노비를 이용하여 경작되었다. 노비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가작’(家作)이라고 하여 말 그대로 주인집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이다. 주로 집 근처의 경지에 대하여 노비를 직접 지휘 감독하여 수확한 생산물을 모두 주인이 취하는 방법을 말한다. 또 하나는 ‘작개’(作介)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부르는 방법인데, 주인집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경지를 경작할 때 이용된 방법이었다. 노비에게 ‘작개’라고 부르는 토지와 ‘사경’(私耕)이라고 부르는 토지를 짝을 지어서 지급하되 ‘작개’의 수확은 거의 모두 주인에게 상납하고 ‘사경’의 수확은 노비에게 주어 생활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
노비 이용한 가작 작개 거쳐 소농경영 발전
이러한 ‘작개제’에 의한 경영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루어졌다. 한 가지 사례로 1554년에 서울에서 사는 안(安)씨 양반가는 경기도 파주에 509두락(1斗落=1마지기=200평으로 계산해서 10만1800평)의 농장이 있었는데 9명의 노비에게 ‘작개’ 156두락과 ‘사경’ 151두락을 짝을 지어 지급하였다(61%). 나머지는 거의 모두 소작을 주었다. 노비에게 지급된 토지는 노비가족의 노동력으로 경작되었는데, ‘작개’에는 가치가 높은 논이 주로 할당되었으며 ‘사경’은 가치가 낮은 밭이 중심이었다. 무엇보다 ‘작개’의 수확은 거의 모두 주인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노비가 ‘작개’를 열심히 경작할 인센티브는 전혀 없었다. 이로 인해서 주인은 김매기(제초), 씨 뿌리기(파종), 상납액 등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노비의 노동 강도를 높이려고 하였다. 김매기를 제때에 안 하면 곤장(杖) 20대, 씨를 제때에 안 뿌리면 30대를 때린다고 되어 있었고 상납이 정해진 기준에 못 미칠 때는 미납액이 많아질수록 때리는 횟수를 늘려갔다. 네거티브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는데, 20두락 면적의 작개에서 상납이 10석에서 못 미치는 경우에 10두(말) 미납에 5대를 때리기 시작하여 7석을 미납하면 최다 70대까지 때리도록 정해두었다. 70대를 다 맞으면 살기가 힘들 것이다.
항상 농업은 소농경영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온 것 같이 생각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성립된 것이다. 소농경영이 안정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농기구와 함께 쟁기질에 이용할 소도 충분히 보유해야만 하였다. 강희맹(1424-1483)이 저술한 『금양잡록』(衿陽雜綠)에는 "촌락에 백 집이 있으면 가축을 가진 것이 겨우 10여 집이고 소를 가진 집도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송아지를 밸 수 있는 암소를 제외하면 겨우 몇 마리이다. 백 집의 경지를 소 몇 마리로 경작하니 넉넉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15세기에는 소가 열 집에 한 마리꼴이 채 못 되었는데 20세기 초에는 전국 230만여 농가가 70여만 마리를 보유하여 3~4집에 한 마리꼴로 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소가 많아진 것이다.
시비법 등 기술 발달로 농가 생산성 높아져
또한 비료를 주는 방법(시비법)의 발달로 경지를 묵히지 않고 매년 경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앙법(移秧法) 곧 모내기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을 절감하고 이모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직파법의 경우에는 적어도 4차례 이상의 김매기를 해야 하지만 이앙법을 이용하면 2차례로 충분하게 되었다. 제초제가 나오기 전의 농업은 잡초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앙법을 이용하면 잡초를 뽑는 김매기 노동이 절약되어 노동생산성이 증가하였다. 같은 노동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절감된 노동으로 농사에 정성을 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다른 작물의 생산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어 농가경영이 집약화되고 다각화되었다. 특히 면화의 김매기 시기와 벼농사의 김매기 시기가 겹쳐 노동력이 부족한 하층 농가는 면화를 재배하는 것이 곤란하였는데, 벼농사에서 절약된 노동을 면화에 투입할 수 있게 되어 면화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보리를 추수하는 기간에 벼를 모판에서 기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같은 면적의 토지에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토지생산성이 증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소농경영이 집약적이 되고 다각화됨으로써 소농경영이 안정적이 되었다. 이앙법으로 인해 노동력이 절감되어 조선후기에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광작’(廣作)이 발전하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였다. (1)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광작은 자원부존 조건에 맞지가 않았다. (2) 넓은 면적의 토지를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여 경작하는 대 경영은 지주제(병작제)에 비하여 불리하였다. 토지를 빌리려는 경쟁이 치열해서 지대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땅이 많으면 소작을 주는 것이 유리하였다. (3) 17세기부터 대동법에 의하여 공물이 토지에 부과되는 지세로 바뀌어 광작이 불리해졌다. (4) 광작은 경작하는 면적이 넓어 지력을 보강하는 데 힘을 쓸 수가 없어 비옥하였던 토지가 점점 척박한 땅이 되었다.
이앙법 보급은 하층 농민들 자립하는 계기
이앙법의 효과는 광작(대경영)의 발달이 아니라 하층 농민들이 지주로부터 토지를 빌려 소농으로 자립하게 되는 것이었다. 1799년에 안성군수(정문승)가 “이앙은 파종에 비해 공력이 덜 들고 비용이 절감됨이 열 배가 될 뿐만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가난한 집과 힘이 약한 백성들(貧戶殘民)이 병작(소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앙을 금지하면 빈농들이 병작을 못하게 되어 식량을 구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후기에 광작에 의한 대경영이 발달하여 마치 산업혁명 전야의 영국에서 농업자본가에 의해 자본주의적 대경영이 발달하는 것과 동질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주장은 실증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집약적인 소농경영의 성장이 지주제의 발달과 짝을 이루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조선후기 농업의 발전 방향이었다. 노비제를 이용한 농장경영이 쇠퇴하는 발전적인 측면은 강조해야 마땅하겠지만 소농경영이 지주제와 함께 발전함으로써 농민의 대부분이 수확의 절반에 달하는 지대(소작료)를 부담하였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대토지소유가 일시 타격을 받았지만 18세기 초에 이미 열 집 중에 자기 땅을 가진 집이 한두 집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록에 보이고(『경종실록』 원년),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초에 전라도에 소작인이 전체 인구의 70%라고 하였다. 한참 뒤이지만 1918년에는 전국 경지 면적의 50%가 소작지였다. 더욱이 본래 씨앗과 조세는 지주가 부담하는 것이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소작인의 부담이 되었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