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베네치아

입력 2014-06-15 20:35   수정 2014-06-16 05:11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수량화 혁명’에서 이분법으로 나누는 사고 구조를 베네치아 스타일로 묘사했다. 베네치아인들은 흑 아니면 백, 이것 아니면 저것,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사고에 능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크로스비는 이들이 특히 돈은 절대로 중간적이지 않다고 여겨 플러스(이익), 마이너스(손해)로 범주화시켰다고 주장한다. 회계학의 원조인 파치올리의 복식 부기가 유독 베네치아에서 탄생한 배경이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 생각은 실질적 사고와 개방성 및 빠른 판단력에 도움이 된다.

베네치아는 이슬람과 교역하는 무역 거점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상업적 능력은 4차 십자군 전쟁에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십자군을 꾀어 오히려 기독교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베네치아는 번성기였던 15세기 들어 도시 인구가 10만명 정도였지만 베네치아제국의 인구는 150만명에 달했다. 이 도시의 부는 세계적이었다.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는 베네치아의 10배나 됐지만 수입은 베네치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다. 자본주의 원조라고 얘기하는 학자들이 많다.

정작 베네치아 문화는 모든 것을 혼합하는 문화다. 서구 문화와 동방 문화를 잇는 해상 거점 도시였다. 개방성과 수용성이 필수 불가결했다. 고딕양식과 이슬람양식, 비잔틴양식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과 모든 면에서 달랐다.

무엇보다 시장을 발달시키고 세계적인 부가 집중된 원인에는 정치적인 안정이 있었다. 이들은 일찌감치 공화정을 채택해 7세기부터 투표를 통해 국가지도자인 도제(doge)를 선출했다. 하지만 도제의 권한은 유명무실했다. 중요한 결정은 국회 격인 대의회가 도맡았다. 대의회는 많은 경우 1500명 정도의 시민들로 구성됐다. 물론 원로원도 존재했다. 도제와 원로원, 대의회 등을 결합하는 베네치아 나름의 정치 구조를 가졌다. 일인 지배와 소수 다수지배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절묘함을 선택한 것이다.

조르조 오르소니 베네치아 시장이 거액 뇌물스캔들에 휩싸여 사임했다는 소식이다. 베네치아에 홍수 방지용 수문 설비를 설치하는 대규모 공사인 ‘모세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뇌물을 받은 혐의다. 자유와 개방, 투명성을 외쳐왔던 베네치아인들로선 수치다. 하지만 최근 독립국가를 주장해왔던 베네치아다. 무언가 정치적 음모의 냄새도 풍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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