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빚·복지수요 느니 당연한 일
가계저축-기업투자 선순환 이뤄야"
박종규 <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jkpark@kif.re.kr >
반도체 호황이 끝나가던 1995년 가을로 기억된다. 1996년 경제전망에 대해 국제통화기금(IMF) 방문단과 의견을 나누던 자리였다. “1996년은 성장률이 6%대로 낮아지는 불황일 것으로 전망된다”는 발표를 듣던 IMF 방문단은 ‘성장률 6%가 왜 불황이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나는 “성장률이 8~9%에서 6%대로 떨어지는데 어떻게 불황이 아닐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쯤 바뀔 만한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한국 경제는 6% 성장도 불황으로 간주한 20년 전의 경제가 더 이상 아니다. 재작년과 작년의 성장률은 6%는커녕 2.3%와 3.0%에 그쳤다. 2년을 연속해 3.0%선을 밑돈 것은 경제개발 이래 처음이었다. 금년 성장률도 고작 3%대 후반에 머무를 전망이다. 경제가 바람 빠진 공인 양 탄력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세게 내리쳐도 튀어오를 줄 모르는 공처럼, 불황을 겪고도 반등을 못하는 무기력한 경제가 돼버렸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진다. “이러다간 일본식 장기침체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많이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이미 장기침체의 한복판에 놓여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현 시점에서 한국이 당면한 가장 중대한 도전은 저성장이며,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저성장의 원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기업소득은 엄청나게 늘어나는 반면 가계소득은 거의 늘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최근까지는 실질임금이 정체된 ‘임금 없는 성장’이 진행 중이다. 2008~2012년의 경우 한국의 ‘임금 없는 성장’이 비교 가능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5개 국가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질 임금이 정체되니 가계소득이 제대로 늘어날 수 없다. 가계소득이 늘어나지 않으니 가계부채는 위험수위를 넘어 파국을 향해 늘어나는 한편 가계저축률은 OECD 바닥수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소득이 정체되니 소비가 부진할 수밖에 없고, 소비가 부진하니 내수가 부진하며, 투자가 늘어나지 않아 제대로 된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청년실업이 줄어들지 않는다. 복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거세지고, 그런 요구를 수용하다 보니 장기재정은 악화돼 미래세대의 부담이 대책 없이 폭증하고 있다. 이 모두 우리가 익히 봐오고 걱정해오던 현상들이지 않은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소득분배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이전 단계, 즉 경제가 창출한 소득이 기업과 가계 사이에 배분되는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발행한 것이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저성장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매사에 신중했던 1기 경제팀에 비해, 새로 지명 받은 2기 경제팀의 면면은 매우 활동적인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경험도 다양하고 풍부하며 정치적 ‘힘’도 세다고 한다. 경제운용에 대한 나름대로의 복안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복안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이 표방하는 경제철학의 이름이 무엇이든, 지금처럼 지나치게 기업 편향적인 소득배분 구조를 바로잡아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를 저성장에서 구해낼 수 없을 것이다. 가계가 빚을 지고 기업이 저축에 몰두하는, 앞뒤가 뒤바뀐 경제구조를 뜯어고쳐, 가계가 저축을 하고 기업은 그 돈을 빌려 투자에 나서는 한국 경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해야, 민생경제도 살리고 경제부흥도 이룰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경기부양책이나 한두 가지 기발한 정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경제 패러다임 전환 차원의 거대한 과제다. 새 경제팀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박종규 <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jkpark@kif.r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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