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과 창고 창업
4년간 사무실서 숙식해결…장비 입소문 나며 美대표 업체로
"에베레스트 가봤어?"
스키여행서 죽다 살아난 경험 통해 세계최초 돔형 텐트 만들어 빅히트
'함께'여서 해피한 히피족
문제아들과 등반하며 직접 멘토…유방암 모금 활동 등 사회 환원도
[ 김순신 기자 ]
세계 곳곳에 해마다 수백만개의 가방을 팔고 있는 아웃도어 업체 ‘잔스포츠’. 미국을 대표하는 아웃도어 업체의 창업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업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잘 꾸며진 사무실에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하기보다는 청바지를 입고 배낭을 메는 것을 좋아한다. 필수품 몇 가지를 구겨 넣은 배낭과 지팡이만 있으면 세상 어디로든 여행을 떠났다. 밥 딜런의 음악과 맥주만이 ‘히피’였던 그의 친구였다.
지난 50년 동안 5만㎞가 넘는 거리를 날아다니고 칸첸중가와 에베레스트 등 전문 산악인들도 오르기 힘든 산들을 수없이 정복한 사람이 잔스포츠의 공동 창업자 스킵 요웰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라
요웰은 3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캔자스주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다. 신호등 하나 없던 작은 마을에 산부인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기 위해 만삭의 몸을 이끌고 100㎞ 떨어진 도시로 나가야만 했다. 그는 1946년 병원으로의 첫 여행 끝에 태어났다.
카우보이였던 할아버지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언제나 요웰에게 모험정신과 근면성을 강조했다. 아버지는 “어느 분야나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며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967년 위치토주립대에 다니던 요웰은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한다. 사촌인 머레이 플레츠가 가방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의한 것. 플레츠의 연인 잔 루이스도 동참했다. 그는 지금이 모험정신을 발휘할 때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과감히 대학을 관두고 플레츠가 기획한 배낭 사업에 합류했다. 삼촌이 운영하던 변속기 정비소 2층을 개조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잔의 이름을 빌려온 잔스포츠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들에게 사업계획 따위는 없었다. 자본도 부족했고 물건을 팔 상점조차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플레츠의 혁신적인 디자인과 잔의 기술, 요웰의 모험에 대한 관심뿐이었다. 요웰은 4년 동안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에 매달렸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일상이었다. 요웰은 “당시 나는 24시간 내내 잔스포츠와 함께 살고 숨을 쉬었다”고 회상했다.
등산과 모험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아웃도어 장비는 호평 속에 여기저기로 팔려나갔다. 겨울 스포츠 브랜드 K2가 그들의 가방을 갖다 팔기 시작했고, 노스페이스 역시 그들에게 판매 문의를 해왔다. 직접 산에서 굴러본 자의 고민이 장비 곳곳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잔스포츠가 최초로 만든 프레임 팩, 돔 형태의 텐트 등은 이후 아웃도어 장비의 기준이 됐다. 1980년대가 되자 잔스포츠는 미국을 대표하는 아웃도어 업체로 성장했다.
모험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
새로운 모험이 닥칠 때마다 요웰은 삶과 사업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산과 대자연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일종의 신앙처럼 작용했다. 그는 자연에서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었고, 사업의 기회도 잡았다.
그는 1971년 스키 여행을 하던 중 산에 고립됐다. 온도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다. 요웰은 거친 눈보라 속에서 낡은 A형 텐트 하나에 의존해 버텨야만 했다. 삼각형의 텐트 모양은 강한 바람에 견디지 못했다. 텐트를 고정하던 막대들이 날아가면서 요웰의 머리에 부딪혔다. 만신창이가 된 요웰은 그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었다.
그는 바람과 거친 환경 속에서 견딜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텐트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요웰과 플레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에스키모의 전통 주택인 이글루였다. 돔 형태의 모양이 강한 바람에 견딜 수 있고 큰 내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세계 최초 돔형 텐트의 탄생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텐트가 발매된 1972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돔 형태의 ‘히피 텐트’에 대한 주문이 쏟아졌다. 주문 물량을 감당할 수 없어 초기 몇 년간은 판매량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텐트를 팔아야 했다. 요웰은 “돔형 구조의 텐트가 잔스포츠를 유명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고 평가했다.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줘라
요웰은 인생에는 하루 벌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은 영혼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사업을 위해서도 좋다”고 말한다.
요웰은 1980년부터 ‘대도시의 등반가들(BCM)’이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BCM은 법을 어겨 보호시설로 보내지는 ‘위기에 처한’ 소년들과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다. 1 대 1로 멘토와 멘티를 정해 아이들에게 아웃도어 기술을 가르치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는 처음에는 배낭 등 여행용품을 제공만 했다. 하지만 매년 BCM을 통해 아이들이 변하는 것을 지켜본 요웰은 후원을 늘리고 직접 멘토가 되기로 했다. 동료들에게 BCM의 중요성을 설득했고, 그 결과 막대한 규모의 재정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는 또 수차례 BCM을 통해 아이들과 여행을 함께 했다. 요웰은 “여행이 끝날 때쯤 아이들의 자존감이 회복된다”며 “유대감을 통해 놀랄 만한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그의 관심은 아이들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요웰은 ‘영감을 주는 원정’이라는 등반 행사를 기획했다. 유방암의 위험성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유방암 퇴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목표액은 2100만달러였다. 그는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노력으로 모금은 성공했다. 그 결과 유방암을 이겨낸 17명이 1995년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아르헨티나의 아콩카과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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