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최종판결에 수년 걸려
자국 편들기 피하고 비밀 유지
[ 양병훈 기자 ] 시멘트 등을 생산하는 회사 ‘성신양회’의 안창석 법무팀장은 1일 서울 서린동에서 열린 ‘기업인을 위한 국제중재 길잡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회사가 무역을 많이 하는 데다 최근 다른 해외 투자처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안 팀장은 “지금까지 해외 기업과 계약을 맺을 때 중재 관련 조항을 관행처럼 넣었는데 이런 조항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볼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삼성에버랜드, 카카오, 현대중공업, JW홀딩스, 한화자산운용, LG CNS 등도 이날 사내 변호사를 세미나에 참석시켰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해외 상업거래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인 국제중재에 대해 국내 기업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 기업의 국제중재 분쟁금액(재판에서 소가에 해당)이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자연 기업 자체 법무팀의 국제중재 전문성도 강화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기업들이 주로 국제중재에 관심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중견·중소기업 등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지난해 한국 기업 국제중재 20조원
1일 한국경제신문이 세계 5대 상업분쟁 중재 기구와 대한상사중재원(KCAB)에 접수된 사건을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의 국제중재 분쟁금액은 지난해 18조5017억여원으로 2010년 7294억여원에 비해 크게 늘었다. 지난해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에 접수된 대형 사건이 일시적으로 증가한 영향도 있지만 ICC 사건을 제외해도 2010년 2812억여원에서 지난해 2조871억여원으로 증가세가 확연하다.
이런 산업계의 관심을 반영하듯 이번주 국내에서 열렸거나 열릴 예정인 국제중재 관련 행사만 4개에 이른다. 법무부는 지난달 30일 ‘상사 중재의 선진화 방안’을 주제로 포럼을 가졌고,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는 1일 ‘기업인을 위한 국제중재 길잡이’ 세미나를 열었다. 법무부 포럼에 발표자로 나온 김갑유 변호사(ICC 국제중재법원 부원장)는 “한국 기업이 동북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국제중재를 많이 하고 분쟁금액도 크다”고 설명했다.
2일에는 한국중재학회(KAAS)가 ‘중재법 개정의 주요 쟁점 및 제언’ 발표대회를 열고 3일에는 KCAB, 서울국제중재센터(SIDRC),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가 함께 ‘해외 진출 기업의 분쟁 해결방안’ 설명회를 가질 계획이다. 정선화 HKIAC 변호사는 “중소기업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계약서 작성 방법부터 중재기관 선정시 유의사항 등을 꼼꼼하게 브리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판보다 간편하고 신뢰도 높아 선호
기업들은 중재를 선호하는 이유로 재판보다 절차가 빠르고 간편하다는 점을 꼽는다. 재판은 아무리 빨라도 최종 판결을 받을 때까지 수년 이상 걸리고 인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수십년씩 걸리기도 하지만 국제중재는 대부분 1~2년 안에 결론이 난다. 또 절차 진행에 대한 결정권을 판사가 독점하고 있는 재판과 달리 중재는 당사자가 합의만 하면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진행할 수 있다. 모든 절차와 내용을 공개 원칙으로 하는 재판과 달리 중재는 사건 일체를 비밀에 부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한상훈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중재는 민간 기구에서 하다 보니 각 나라 법원의 ‘자국 기업 편들기’를 피할 수 있다”며 “특히 사법제도가 투명하지 못한 제3세계 국가의 법원에서 재판받는 일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성우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SIAC 상임위원)는 “재판은 결과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이행이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중재는 다자 간 중재 이행 협약(뉴욕협약)에 가입돼 있는 149개 국가라면 대부분 이행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중재지역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국제중재 사건 유치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지만 한국은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며 “무역규모와 지정학적 위치 등에서 잠재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중재산업을 육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