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유보금 줄이면 투자여력 약화시켜
[ 이태명 / 이상은 기자 ] 정부가 내수 진작을 위해 ‘대기업 사내유보금’에 손을 댈 움직임을 보이면서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기업이 ‘과도하게’ 쌓아둔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물리거나, 임직원 성과급으로 풀 경우 세제 혜택을 주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재계는 그러나 정책 실효성이 없을 뿐 아니라 기업의 투자 여력만 악화시킬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사내유보금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은 뭘까.
(1)사내유보금은 현금이다?
사내유보금에 관한 대표적 오해는 ‘사내유보금=현금’이라는 것이다.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대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수백조원의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고 비난하는 논리의 근거다. 타당한 지적일까.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한 해 벌어들인 이익에서 법인세, 주주 배당, 성과급 등으로 지출한 금액을 제외하고 사내에 쌓아둔 돈’을 뜻한다. 재무상태표상 자본 항목의 ‘이익잉여금’을 통상 사내유보금으로 본다. 그런데 이익잉여금은 ‘현금’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기업이 보유한 공장, 토지, 재고, 특허권, 영업권 등 주요 자산의 가치를 평가해 반영한 장부상 숫자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직장인 A씨가 10년간 1억원의 재산을 모아 1000만원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9000만원은 자동차·주택 구입에 사용했다고 치자. 이 경우 A씨의 ‘사내유보금’은 1억원이지만, 실제 보유한 현금은 1000만원뿐이다.
(2)사내유보금은 넘쳐나는데 투자하지 않는다?
삼성전자의 작년 말 기준 이익잉여금(사내유보금)은 148조6000억원이다. 이를 두고 ‘삼성전자가 투자는 않으면서 사내 곳간만 채운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삼성전자 이익잉여금에는 공장 부지, 건물, 기계장치 등 유형자산(75조5000억원), 영업권 및 특허권 등 무형자산(4조원), 재고재산(19조1000억원) 등 현금이 아닌 유·무형자산이 103조원에 달한다.
이익잉여금의 70%가량은 이미 설비투자 등에 쓰였다는 의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의 사내유보금 중 이미 투자한 자산 비중은 84.4%(2010년 기준)에 달했다.
(3)한국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과도하다?
해외 기업과 비교해 국내 기업들의 사내유보금, 현금성 자산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도 사내유보금과 관련한 주된 지적이다. 국내 기업이 주주 배당이나 투자에 인색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국내 기업의 현금배당 성향은 22%(2012년 기준)로 미국(38%), 영국(48%) 등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해외 기업보다 훨씬 적은 수준이다.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3조원인 반면 애플은 167조원, 마이크로소프트는 88조원, 구글은 62조원에 달한다. 한국과 미국의 10대 기업 매출액 대비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비중도 한국은 13.1%인 데 비해 미국은 15.3%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 환경이 불확실해지면 기업들은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늘리는 보수적 경영 전략을 짜기 마련”이라며 “규제완화 등 경영 환경은 개선해주지 않고 무작정 투자만 늘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4)유보금 풀어 가계소득 높인다?
정부가 사내유보금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내수 진작을 위해서다. 사내유보금 중 일부를 성과급이나 배당으로 사용하면 가계 가처분소득이 늘어나 소비심리가 살아날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그러나 사내유보금을 줄이라는 것은 기업 재무구조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내유보금을 줄이면 자기자본 역시 감소하고, 결국 기업의 안정성 지표인 ‘총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이 낮아진다는 점에서다. 재무구조가 악화되면 기업은 투자를 꺼리고 투자가 위축되면 경기 부진, 내수 위축을 불러올 것이라는 게 기업들의 우려다.
이태명/이상은 기자 chihir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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