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500년이 넘게 장수하였는데 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래 지속된 왕조는 보기 드물다. 왕조의 수명이 길다고 하는 중국에서도 당(唐), 명(明), 청(淸)이 300년에 못 미쳤다. 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일본 천황가도 고대국가 쇠퇴 이후에는 실권을 상실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후에는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막부(幕府)가 새로 성립하였으며, 중국에서도 명이 멸망하고 왕조가 청으로 교체되었다. 그렇지만 전쟁의 주 무대였던 우리나라의 조선왕조는 300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조선왕조는 어떻게 이처럼 오래 존속할 수 있었을까?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왕권과 신권의 균형 등등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경제학적으로는 국가 구성원이 왕조(국가)로부터 얻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주는 것이 없고 수탈하기만 한다면 국가 구성원들이 협력(복종)하기를 그치고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19세기 들어와 정치적 변란이 급증하였을 뿐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는데(그림 참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군주제, 엘리트층에 특권 부여
국가 구성원이라고 하지만, 조선왕조는 정치권력이 일부 구성원에게 독점된 군주제 국가였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자원에 대한 접근이 허용된 지배층(엘리트)과 접근이 제한된 일반 대중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조선왕조의 엘리트는 말할 것도 없이 양반이며 대중은 양인과 노비들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할 때 ‘사’를 엘리트, 나머지 ‘농공상’을 대중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자원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국가를 다소 생소하지만 ‘자연국가’(natural state)라고 부르기로 하자(D.C. North 외, 《폭력과 사회적 질서(Violence and Social Order)》, 2009).
인류사에서 국가는 자연국가로서 탄생하였는데, 군사적 경쟁의 주체인 무력을 소유한 엘리트들이 자원에 대한 접근을 독점하는 대신에 지배층으로 연합함으로써 성립하였다. 초기에는 지배자(국왕)의 인격적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매우 불안정하고 단명하였지만, 그중 일부는 내구성을 갖춘 성숙한 단계로까지 발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왕권 세습에 관한 제도나 관료제와 법률을 갖추고 국가 외부에도 다양한 조직과 사회제도가 발달함으로써 환경 변화에 따른 충격을 견딜 수 있는 강한 복원력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성숙한 단계에 도달한 자연국가로 판단되는데, 자연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기능은 자원에 대한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생기는 수익, 경제학에서 말하는 렌트(rent)를 엘리트에게 보장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파생하는 사회적 편익은 군사적 경쟁(전쟁)을 종식함으로써 사회적 질서(평화)가 수립되는 것이다. 엘리트에게는 렌트의 확보가 중요하겠지만 대중에게는 사회적 질서가 국가를 지지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무질서는 누구도 견디기 어렵지만 대중은 더욱 취약하기 때문이다.
양반, 국정 참여 독점 이익 향유
조선왕조의 엘리트에 해당하는 양반은 무엇보다 관직에 나아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하였다. 이를 통해 대중들이 얻지 못하는 이익(렌트)을 향유하였다. 더욱이 중국과 달리 서얼과 상공인을 배제함으로써 엘리트의 증가와 분열을 억제해 동질적인 정체성을 장기간 유지하였다. 양반은 서양 중세의 영주와는 달리 독자적인 무력이나 영지를 가지고 있지 못해 국가에 의해 공급되는 과거제와 관직이 자격을 유지하는 원천으로서 매우 중요하였다. 관료로서 지위가 수입의 원천이기도 하였지만, 증식된 재산을 권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도 양반 지위가 긴요하였다. 특히 입역노비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지방 행정기구를 통해서 통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양반이 아니면 많은 노비를 관리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였다. 양반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뿐 아니라 양반 간 형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국가의 재정기구로부터 얻는 여러 가지 현물을 선물로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생활 자료를 확보하는 동시에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확인하고 유대를 강화하였다.
한편 양반들은 특권적인 신분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서양 귀족과 같이 관직이나 신분이 가산(家産)으로서 세습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서는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장기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과거와 관직을 둘러싼 경쟁은 매우 치열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 양반 집단에 과거 합격이나 관직이 독점되는 경향이 나타났지만 결코 과거제가 폐지되거나 관직이 세습되는 것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조선왕조 관료제의 개방적 성격은 양반들이 조선왕조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만드는 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또한 독자적인 군사력도 없이 지방에 농민들과 함께 거주하였던 양반은 대중들의 집단행동에 대하여 국가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며, 대중의 평판에도 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중의 입장에서 조선왕조로부터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물론 불만이 있더라도 무임승차(free rider) 문제로 인하여 반란과 같은 집단행동은 일어나기 어렵다. 집단행동의 혜택이 전체 구성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다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무임승차 문제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정감록이나 동학과 같은 종교(이데올로기)는 대규모 민란의 발생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렇지만 조선왕조가 강제력에 의해서만 대중들을 복종시켰다고 한다면 지나칠 것이다. 조선왕조는 사회적 질서를 수립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제3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농업 재생산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하면 국가가 저장한 곡물을 방출함으로써 농민들의 생존 위기가 정치적 위기로 비화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봄에 종자와 식량을 공급하였다(21회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 저장 국가’ 참고). 조선왕조는 대중들이 국가에 의지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렌트 분배와 공공재 공급의 균형이 관건
문제는 양반들에게 렌트를 보장하는 것과 대중에 대한 공공재 공급 간의 균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양반들의 렌트가 증가하게 되면 국가가 지배하는 자원에 제약을 가하게 되고 국가재정은 취약하게 될 것인데, 취약한 국가재정은 환곡제도를 비롯한 공공재 공급에 애로를 발생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장기간 지속된 것에는 이런 어려운 균형을 장기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엘리트에 의한 자원의 독점은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밖에 없으며, 생산성의 획기적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인구 증가로 인해 가중되는 인구 압력은 국가가 수취할 수 있는 잉여를 감소시킴으로써 렌트 분배와 공공재 공급 간의 균형을 점점 곤란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19세기에 ‘민란의 시대’라고 할 만큼 민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란의 대표격인 1862년의 진주민란이 환곡 운영의 폐단에서 발단되었음은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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