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희 기자] 큰 보폭으로 걷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감정기복이 클지언정 제자리걸음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앞질러 가던 이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몸을 비틀었다. 새로운 시도. 처음으로 걷는 길. 그럼에도 앞장 서 걷는 여배우에 대한 불신은 없다. 손예진이기 때문에.
최근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감독 이석훈) 개봉 전 한경닷컴 w스타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손예진은 조금은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몸짓을 가진 여배우였다.
그에게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조금은 낯선 것들. 액션 연기, 퓨전 사극, 여자 해적이라는 캐릭터는 처음이라는 강렬함만큼이나 어색하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하지만 손예진은 그런 우려를 비웃듯 유연하게 움직인다. 어딘지 모르게 매끄러운 인상.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듯한 몸짓. 그것은 우리가 손예진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전까지는 액션에 대한 관심도, 욕심도 없었어요. 하지만 여월을 만나는 순간, 놓치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다른 배우가 하면 아까울 것 같기도 하고요. (웃음)”
KBS2 드라마 ‘상어’가 종영한 뒤, 바로 영화 촬영에 몰입했다. “처음하는 액션”인지라 “어설프게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연습에 매달렸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뿐이었고, 현장에서 배우들과 합을 맞추는 것 역시 타이트한 스케줄에 시달려야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해본 적이 없는 거라서 저도 모르게 여성스러운 몸짓이 나오더라고요. 뛸 때 손을 좌우로 움직인다던가. (웃음) 넘어질 때 여성스러운 것 있잖아요. 다행히 여월은 선이 고운 액션이었지만 그래도 화면을 보면 제 어설픈 모습만 보이더라고요. 치열했어요. 완전 전쟁터였어요.”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극 중 여월은 해적단의 대단주로서 강렬하면서도 유연한 액션을 선보였다. 연검을 휘두르기도 하고, 상대가 휘두르는 칼을 체조하듯 뛰어넘기도 한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똑똑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볍고 여성스러운 몸짓이라도 연약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강하더라도 악인 소마(이경영)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염려를 뛰어넘는 여월은 늘 악행을 저질러왔던 대단주 소마를 끌어내리고, 소단주에서 대단주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웬만한 사내들보다 더 강단 있고 단단한 인상을 남겼다.
여월의 강성은 곧 액션으로 증명된다. 마치 무용을 하듯 몸을 움직이다가도 치고받고 주먹다짐을 하는 장면에서는 망설임이 없다.
“잘 몰랐으니까 가능했죠. 정말 안 다친 곳이 없어요. 다 까치고, 넘어질 때도 얼굴로 넘어지고. (웃음) 낙법도 사실 일주일 내내 배워도 모자란 거잖아요. 그걸 그냥 했으니. 매트 위라도 얼굴로 떨어지니까 보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졌죠. 어휴, 정말 모르니까 했지. 당분간은 못할 것 같아요.”
손예진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많은 수식어들. 청순, 가련, 연약, 청초 등 다소 민망해질 수 있는 ‘예쁜 말’들 가운데 여자 해적이라는 다소 거대한 타이틀이 붙었다.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었던 그는 “이제껏 여자 해적은 본 적이 없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창조하려 애썼다.
겨우 아는 것은 “후크선장과 캐리비안 해적 뿐”이라서 “동양적인 해적을 만들기 위해 헤어, 메이크업, 의상까지 전부 신경 썼”다. 애정이 깃들 수밖에 없던 캐릭터였다.
“여자 해적은 처음으로 나오는 거니까요. 사람들이 해적이라고 하면 막연한 기대감은 있되 떠오르는 건 없잖아요. 그걸 만들어보자 했죠.”
세밀하고 깊었다. 늘 그가 연기해온 인물들은 가장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해적’은 그런 감정의 깊이 보다는 오락성과 배우들의 호흡이 중요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달랐다. 이제까지 손예진의 걸음과 폭에서 오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오락 영화는 처음이죠. 깊이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으니까. 볼거리가 이미 충만한 상태라서, 제 역할만 수행하면 됐어요. 사실 시나리오에서 여월의 감정이나 살아온 과정은 보여지지 않으니까요. 배우로서 내 캐릭터를 만들고 앞뒤 사정을 풍부하게 만들고 싶은데, 우리 영화에서는 이 정도 선이 딱이었죠.”
고독한 여두목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개인의 욕심으로는 더 개그감이나 연기에 있어서 욕심났지만” 과하지 않도록 적정선을 지키고자 했다. 산적, 해적, 거기에 개국 세력까지 모였으니 서로가 튀려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면 무너져 내릴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연기에 있어서 적정선을 지키는 것. 모두 알고는 있지만 쉽게 지키지 못하는 것 중 하나 아닐까. “산적단의 코믹 연기도 탐나지 않았어요?” 평소 코믹 연기를 잘 소화해냈던 걸 기억하고, 묻자 그는 “그러니까요”라며 얄궂은 표정을 짓는다.
“제가 또 코믹의 피가 흐르잖아요. 남 웃기는 걸 진짜 좋아해요. (웃음) 시나리오 보면서 재밌던 건 산적부분이니까. 욕심이 나긴 했죠. 하지만 여월이 중심을 잡고, 무게가 있어야 하니까. 아쉽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어설프게 웃기려고 했으면 오히려 안 웃겼을 거예요. 그림 자체로도 충분히 웃길 수 있는데 더하면 더할수록 오버하는 것처럼 보였겠죠. 완급조절이 필요한 거죠.”
타이밍이 묘하다. 드라마 ‘상어’ 종영 이후 똑같은 상대 배우와 연달아 영화 촬영에 돌입했다. 김남길은 이를 두고 “익숙함에서 오는 깊이가 있다”며 손예진과의 호흡을 언급하기도 했다. 배우가 많기 때문에 다소 산만할 수 있는 화면에서 두 배우가 주는 익숙함은 안정감이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전작의 배우와 연달아 작품을 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물었다.
“맞아요. 보통은 피하죠. 저도 의아했어요. 저야 뭐 이 사이에 ‘공범’이 개봉하긴 했지만, 촬영은 ‘상어’ 끝나고 바로 했으니까요. 하지만 제작하시는 분들이 다른 장르고, 개봉도 1년 후에 할 예정이니 무리가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 만약 새롭지 않고, 매력이 없었다면 둘 중 하나가 하차하지 않았을까요?”
고민했다. ‘상어’ 종영 후 바로 ‘해적’으로 합류하기까지 많은 생각이 손예진을 스쳤다. “매력적이지만 체력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 시나리오를 두고 망설였고 “욕심냈다가 민폐를 끼칠까” 머뭇거렸다.
먼저 ‘해적’ 출연이 결정된 김남길은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가 카리스마 있는 해적으로 변신하는 것”의 매력 때문에 발 벗고 그를 ‘꼬시기’에 나섰다.
“뭐야. 남길 오빠 때문에 한 건 아닌데. 별로 도움 안 됐는데. (폭소) 사실 시나리오는 몇 년 전에 봤죠. 그때도 이미 남길 오빠와 제가 물망이었어요. 그리고 ‘상어’를 함께 찍게 됐고요. 같이 할 운명인가 생각했죠. 제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시기적으로 욕심내는 게 맞나 싶어서 체력적,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했던 거예요. 누가 꾀어서 하게 된 건 아니고요.”
첫걸음은 더디다. 고민도 많고, 망설임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아주 익숙하다는 것처럼. 때문에 그의 걸음을 쫓는 관객들 역시 두려움이 없다. 그야말로 믿고 보는 배우기 때문에.
“사실 찍을 땐 힘들었죠. 처음 하는 액션, 사극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고독한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현장이 힘든 것보다 혼자 고민하는 게 많았어요. 재밌는 시나리오가, 재밌는 결과물로 나오는 게 사실 힘든 일이에요. 찍으면서도 반신반의할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결과물을 보니 고통과 힘듦이 사라졌어요. 정말, 눈 녹듯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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