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풀어 반짝경기 살리는 것보다
親기업 환경 만드는 게 옳은 방향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 교수 jwan@khu.ac.kr >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서적인 ‘직지심경’이 발간된 것은 1377년 고려 때다. 독일이 자랑하는 구텐베르크 성서가 나온 것은 1450년이다. 직지심경이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약 80년이나 앞서 있었다. 또 종이, 화약, 나침반은 중국에서 먼저 발명돼 서양으로 건너갔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기술이나 문명에서 분명히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서양이 동양보다 훨씬 더 발전했고 잘산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에 있다. 서양에 비해 동양에서는 왕의 권력이 매우 강했고 신분제도가 무척 완고했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상업을 배척했다. 상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 하나의 세력으로 커지면 자신들의 위치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에서 장보고 이후 해양무역이 철저히 통제됐고, 명·청으로 이어지는 중국에서 역시 해상무역의 구역과 해상 출항이 엄격히 통제되는 등 상업 활동이 극히 제한됐다.
반면 서양에서는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상업이 발전했고, 부유한 상인들이 새로운 시민계급으로 대두돼 시민사회로 발전하며 근대화를 이뤘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네덜란드와 영국이다. 이들 국가는 왕권 강화보다는 사유재산권을 확립·보호하고 기업의 국내외 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이것이 국민들의 창의력과 기업 활동을 자극해 번영을 이뤘다.
이 역사적 사실들이 주는 교훈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기업의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뿐만 아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기업의 활동이 얼마나 왕성한가에 따라 국가 경쟁력과 국력이 갈린다.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선진국이 됐던 과거 일본을 봐도 그렇고 최근 가까운 중국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대한민국의 경제가 매우 걱정스럽다. 그동안 동반성장이다, 경제민주화다 하면서 온갖 규제와 반(反)기업적 분위기를 조성해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투자가 줄어들면서 우리 경제가 성장 동력을 잃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좀처럼 기업환경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경환 의원이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됐을 때 기대를 참 많이 했다. 특히 그가 정치인들 중 누구보다도 시장경제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경제를 회복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업 환경을 조성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부총리로 임명되고 나서 그가 첫 번째로 내놓은 정책은 기업 활동을 억제하는 장애물들의 제거가 아닌 기업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는 사내 유보금에 대한 과세였다.
게다가 추가로 내놓은 정책이 확대 거시정책이다. 물론 일부 주택 관련 대출 규제 완화가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이 재정과 금융을 통해 돈을 풀어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것이다. 기업 환경 개선 없는 확대 거시정책은 사상누각이다. 확대 정책으로 경기가 일시적으로 살아나는 반짝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언젠가 그 거품이 꺼져 더 큰 불황을 맞고 경제가 더욱 어려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고무돼 주가가 오르는 등 증시가 뜨거워지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다.
경제를 살리는 것은 기업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풀어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 이것은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있는 이웃 일본에서 나타난 사실이다.
지난 7·30 재·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여당인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게 됐다. 정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해졌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기업들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정책들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핑계댈 데도 없다. 늦지 않게 올바른 정책방향을 잡기 바란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 교수 jwan@kh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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