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라 기자 ]
‘애브비의 샤이어 인수에 찬성한다면 지금 말을 해달라. 반대한다면 우리의 거친 모험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아일랜드 희귀의약품 제약사 샤이어의 주주들은 지난달 미국 제약사 애브비의 경영진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긴급 서한을 한 통씩 받았다. 이 편지에는 미국 화이자의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인수 실패 사례도 들어 있었다. 세계 1위 제약사 탄생을 눈앞에 두고 아스트라제네카 주주들은 막판까지 찬반 논란을 벌였고, 주주들의 입김에 의해 네 번의 협상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애브비의 전략은 적중했다. 며칠 뒤 샤이어 주주들은 언론과 이사회에 “샤이어를 애브비에 팔고 싶다”고 발표했고, 협상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샤이어 인수전이 글로벌 인수합병(M&A) 시장의 가장자리에 숨어 있던 주주들이 무대 중심으로 나와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요즘 미국 기업과 주관사 사이에서 “M&A에 성공하려면 피인수기업 주주들부터 설득하라”는 말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힘세진 주주들
최근 미국 내 행동주의 투자자(shareholder activism)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반 투자자의 입김도 세졌다. 행동주의 투자는 기업 투자로 일정 수준의 의결권을 확보한 뒤 사업전략 변화나 구조조정, 지배구조 개선 등을 유도해 단기간에 기업가치를 높여 수익을 올리는 투자 행태다. 기업가치가 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인 경영 개입을 통해 차익을 실현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행동주의 투자자의 타깃은 주로 작은 회사였지만 최근 대기업도 표적이 됐다. 맥킨지에 따르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타깃이 된 미국 기업의 시가총액은 2009년 20억달러에서 지난해 100억달러로 늘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 투자가 기업가치를 높인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관투자가들도 이들을 ‘투기세력’이 아닌 ‘기업 가치를 높이는 세력’으로 보게 됐다. 실제 행동주의 펀드가 투자한 기업의 시세차익과 배당금을 더한 총 주주 수익률은 투자 전보다 높아져 3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FT는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기관투자가 등의 지지를 등에 업고 1% 미만의 적은 지분으로도 이사회를 장악한다”며 “대기업 경영진도 이제 주주들의 말 한마디에 꼼짝 못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TF 투자 확산도 원인
기업의 태도도 변했다. 과거에 비해 투자자의 목소리를 더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것. 인수 기업이 피인수 기업 주주들에게 매각 협상 이전에 M&A 예고를 하면 차익실현을 노리고 뛰어드는 투기세력의 무분별한 개입을 방지할 수 있다. FT는 “소위 ‘훼방꾼’으로 묘사되는 초단기 투자자들은 M&A를 성사시키기 위해 무조건 목소리를 높이고 본다”며 “충성도 높은 장기 투자자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M&A 이후 합병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도 더 좋다”고 설명했다.
주가와 연동되는 상장지수펀드(ETF)에 돈이 몰리는 것도 인수 기업이 피인수 기업 주주들의 눈치를 보게 된 이유로 꼽힌다. ETF는 특정 지수와 수익률이 연동되는 펀드로 주식시장에서 직접투자가 가능한 상품이다. 통상 주가 상승기에 장기 분산투자를 원하는 투자자가 ETF에 몰리는데 지난 3년간 S&P500지수가 약 50% 오르면서 미국 내 ETF는 호황을 맞았다. ETF는 투자자들에게 연 0.47%의 운용 수수료를 요구한다. 반면 ETF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은 1.24%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 FT는 “펀드매니저들이 펀드 운용 수수료가 높은 만큼 실적을 내야 하는 압박이 크기 때문에 ETF에 편입된 기업 매각 협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행동주의 투자자를 지지하는 셰어홀더-디렉터익스체인지의 짐 울러리 대표는 “미국 주주들은 펀드매니저를 압박해 회사가 좀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이끄는 것을 주주들의 정당한 몫이라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한경+ 구독신청] [기사구매] [모바일앱]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국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