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은 왕이다.’
무엇보다 소비자를 우선시하는 기업들의 치열한 마케팅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문구다. 어느 음식점 벽에 쓰여있는 ‘손님이 짜다면 짜다’는 소비자가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비위를 맞춰야 하는 ‘고객중심주의’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마케팅 맹점을 악용해 기업을 상대로 악의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고 거액 보상금을 요구하는 ‘블랙 컨슈머’ 때문에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는 구매한 상품의 하자를 문제 삼아 기업을 상대로 과도한 피해보상금을 요구하거나, 거짓으로 피해를 본 것처럼 꾸며 돈을 뜯어내는 소비자를 말한다. 한마디로 ‘악덕소비자’다. 기업들의 블랙컨슈머 대응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착한 소비자들까지 피해를 보게 만드는 블랙컨슈머에 ‘당근’을 주는 대신 ‘채찍’을 드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교환은 뒷전, 속셈은 ‘금전보상’
“이 구두 신고 허리 디스크 걸렸어요. 당장 보상해줘요.”
최근 A백화점에서 구두를 산 40대 여성은 신발을 신고 한 달 만에 허리디스크가 생겼다며 환불과 정식적 피해배상을 요구했다. W은행에서는 자신의 계좌에서 1만21원을 찾은 고객이 창구에서 난동을 부려 직원들을 당황시킨 일도 있다. 이 고객이 1만21원을 찾는데 왜 1만30원을 주느냐며 항의한 것이다. 이는 모두 전형적인 블랙컨슈머의 행동이다. 이들은 환불·교환은 뒷전이고 금전보상부터 요구하거나 고성을 질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또 처음부터 피해 사실을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하고 무조건 임원이나 사장부터 나오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거액 보상금을 노리고 기업에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는 기업들의 골칫거리다. SNS에는 각종 ‘AS 성공비결’이라는 글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무료로 새 휴대폰으로 교환할 수 있는지, 고급화장품을 공짜로 써볼 수 있는지 등이 버젓이 노하우(?)로 소개돼 있는 것이다.
인터넷 해외 사이트에서 물건을 싼 값에 직접 구매하는 직구족이 크게 늘어나는 가운데 ‘블랙 직구족’까지 등장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블랙 직구족은 해외 유통사가 소비자 평가에 민감하다는 점을 악용, 포인트 적립을 지나치게 요구하거나 배송이 느리다며 재배송을 요청해 상품을 2번 받는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직접구매는 1조3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얌체 직구족이 늘면서 해외 업체들이 실시하는 각종 서비스가 중단되기도 해 선량한 소비자만 피해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당근’보다 ‘채찍’ 드는 기업들
“고객은 왕이다. 하지만 폭군처럼 행동하는 고객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블랙컨슈머로 인해 기업의 이미지 훼손과 금전적 손실은 물론 고객을 직접 응대하는 직원들의 정신적 피해가 늘어남에 따라 기업의 대응 자세도 ‘진화’하고 있다. 기업들은 회사 이미지 등을 고려해 블랙컨슈머의 요구에 적당히 응하던 과거와 달리 착한 소비자와 블랙컨슈머를 구분해 착한 소비에 피해를 입히는 행위에는 강경 대응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서비스센터에서 고함을 치며 난동을 피는 블랙컨슈머가 등장하면 다른 고객들의 눈치를 보며 달래기에 급급했지만 최근에는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고지한다. 그래도 막무가내면 법적절차를 밟아 대응한다. 과거 콜센터는 어떤 경우라도 고객의 전화를 먼저 끊지 못하도록 하는 서비스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소비자가 많아지자 ‘먼저 끊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모든 통화를 녹음하고 욕설이 심하면 법적조치 안내를 한 후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있다.
기업과 상생하는 ‘화이트 컨슈머’
제품이나 서비스에 하자가 있거나 불만이 있으면 정당하게 보상을 요구하고 시정토록 하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다. 그러나 거짓이나 사실을 부풀려 민원을 제기하고 이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기업에서 금품을 받는 행위는 소비자 스스로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블랙컨슈머의 횡포를 방치하면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고 선량한 다른 소비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소비자 스스로 기업과 상생하기 위해 ‘화이트 컨슈머가 되자’는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다. 한국소비자브랜드위원회와 한국소비자포럼은 ‘기업과 소비자가 함께 웃는 세상’ 만들기를 위해 화이트컨슈머 캠페인을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블랙컨슈머의 부도덕한 행위 근절과 기업과 소비자가 상생하자는 것이 주목적이다. 화이트컨슈머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consumer social responsibility)으로도 사용된다”며 “소비자 권리와 함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소비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손정희 한국경제신문 연구원 jhs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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