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 기자] 38년만의 이른 추석이어서인지 연휴 마지막 날 선인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제법 많은 땀이 흘렀다. 추석은 하지로부터 73일째 경과한 날이고 일반적으로는 8월 중순에 위치하기 쉬운데 올해에는 하지가 빨라 더운 날씨에 추석을 맞이한 셈이다.
행동식으로 준비해온 대추가 탐스럽게 크지만 아직 맛은 설익었다. 푸른샘 지나 선인봉 동면으로 가는 길에는 산밤이라고 불리는 야생밤이 여기저기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비로소 가을을 실감나게 한다.
도봉산 만남의 광장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선인봉 동면 앞에 서본다. 선인봉은 인수봉과 함께 한국의 등반사를 함께 써온 등반의 메카다. 인수봉이 여성스럽다면 선인봉은 남성답다는 말들을 한다. 예전에는 선인봉을 중심으로 등반활동을 하는 선인파와 인수봉에서 활동을 하는 인수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선인파가 인수봉에 가면 슬랩을 잘하지 못해 등반에 애를 먹고 인수파가 선인봉에 와서 등반을 하면 크랙등반이 워낙 세서 힘들어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오늘 등반할 길은 선인봉의 대표바윗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학교길이다. 난이도 5.12급인 재원길이나 경송b 5.11급의 쟁쟁한 바윗길들인 설우길이나 써미트길, 현암길 등에 비해서 난이도는 떨어진다 하나 힘이 들기로는 여늬 길 못지않은 길이 바로 학교길이기도 하다.
동면의 경송b길 좌측에 여덟 마디의 긴 사선크랙으로 이루어진 등반로 초입에는 각 마디별 난이도와 등반거리표가 깔끔하게 부착되어 있다. 첫째 마디가 등반거리 21미터에 난이도 5.7 둘째 마디가 6미터의 걸어가는 구간 셋째 마디는 23미터의 5.8 넷째 마디는 17미터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5,10d 다섯째 마디는 11미터에 5,7 여섯째 마디는 20미터에 5.10c 일곱째 마디는 25미터에 5.6 그리고 마지막 구간인 여덟째 마디는 37미터의 가장 긴 거리에 난이도는 5.9로 적혀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지만 학교길 난이도는 그야말로 참고에 불과하다, 설령 등반자의 등반능력이 5.11이건 5,12이상이 됐건 학교길 등반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다.
오늘의 선등자는 윤장욱 클라이머(하람산악회). 등산과 리지등반을 즐기다가 암벽등반으로 접어든 지는 불과 2년여밖에 되지 않는 늦깎이 클라이머다. 기자는 그가 인수봉 여명길을 온사이트 등반할 때 빌레이를 봐준 적이 있는데 최고난이도 5.11a의 결코 쉽지 않은 바위길인데도 침착하게 완등을 해내서 주변의 부러움을 산적이 있는가하면 관악산 노클스암장에서 난이도 5.11b의 오케이텐션길을 등반할 때에는 유연하고 과감한 동작에 언젠가 꼭 한번 취재등반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다만 그 장소가 설악산의 울산바위 인클길이나 장군봉의 바윗길에서 선인봉으로 바뀐 셈이다.
등반경력이 길지 않고 경험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가 오랜 경험자 못지않게 능숙하게 등반을 하는 것은 신체적인 조건(176cm / 64킬로그램)도 조건이지만 평소에도 꾸준히 인공암장을 찾아 운동을 하고 군살이 전혀 눈에 띄지 않게 날씬한 체격을 유지하는 등 남다른 노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념도 표지판을 잡고 한번 환한 웃음을 보여준 윤장욱 클라이머가 첫째 마디를 출발한다. 작년에 만원을 주고 샀다는 일명 냉장고바지를 입은 윤 클라이머는 초입에 중형 캠을 하나 설치하고 크랙을 뜯고 올라 이내 첫 볼트에 퀵드로를 걸었다. 그리고 수직의 구간을 넘어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첫 번째 마디를 완료한다.
사실 윤 클라이머의 트레이드마크는 붉은 등반복 하의다. 어느 주말의 인수봉이나 선인봉, 쉽게 구하기 힘든 캐신표 짙은 붉은색의 등반바지를 입고 멋들어진 뿔테안경에 역시 붉은 색의 헬멧을 착용한 날씬하고도 멋진 클라이머가 있다면 그가 바로 윤장욱일지도 모른다.
둘째 마디 확보점은 첫째 마디에서 불과 5~6미터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걸어서 가는 구간이다. 그런데 굳이 둘째 마디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데 첫째 마디 확보지점에서는 둘째 마디의 등반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등빌레이를 보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첫째 마디 확보지점에서는 후등빌레이를 보기에 용이하고 빌레이를 보기위한 스탠스도 썩 좋은 편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확실하게 마디를 구분해 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등반자들은 한 마디를 거저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다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셋째 마디. 사선으로 이어지는 약 23미터의 거리에 볼트는 단 두개가 있다. 다행히 홀드는 양호해서 어느 크랙에 손을 집어넣어도 잘 잡히지만 난이도 5.8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력이 필요하다.
윤장욱 클라이머, 첫 볼트에 퀵을 걸고 출발하여 가로크랙에 캠을 설치한 다음 한 번도 쉬지 않고 두 번째 볼트까지 진출하여 퀵드로를 걸고 자일을 통과시키고서 다음 확보지점까지 등반을 완료한다. 그런데 사실 셋째 마디 두 번째 볼트를 지나서는 후등자를 위해서 캠을 한 두개 정도 설치해주는 것이 좋다.
선인봉 동면의 바윗길을 등반하다보면 의외로 셋째 마디에서 추락하는 후등자들이 더러 눈에 뜨인다. 사선으로 이루어진 크랙이기 때문에 추락을 하게 되면 자연히 왼쪽으로 몸에 펜듈럼하게 된다. 셋째 마디는 선등자는 물론이고 후등자들 역시 추락의 공포가 서서히 시작되는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넷째 마디. 학교길에서 가장 높은 난이도인 5,10d 구간이어서 다소 긴장이 되는 구간. 사선크랙의 모양은 셋째 마디와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셋째 마디 확보지점에서 보기에는 거리는 다소 짧은 17미터에 홀드가 좋아 보여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글쎄…
윤 클라이머가 출발지점 바로 위에 설치된 볼트에 퀵드로를 걸고 이어지는 사선크랙의 가로부분에 각각 0.4, 0.3호의 소형캠을 설치하고 다시 수직크랙에 1호의 캠을 설치한 다음 첫 볼트에 퀵드로를 건다. 그 다음 크랙은 거의 수직으로 가파르게 서게 된다. 양발을 멀리 벌린 스태밍자세를 취한 그는 다시 수직구간을 통과하여 두 번째 볼트에 퀵드로를 걸었다. 그리고 이내 확보점까지 진출하여 전반전인 네 마디의 등반을 끝내고야 만다.
"새로운 세계로의 경험을 즐기고 싶어 암벽등반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윤장욱 클라이머는 "자일 파트너들을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온 정신을 집중하여 오름짓을 할 때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고 말한다. 충남 예산생으로 준수한 외모에 스마트한 이미지는 IT업계나 홍보회사에 근무할 법도 한데 의외로 그는 산업용 공구를 제작, 판매하는 회사에 재직중이라고 한다.
모두 여덟 마디 중 여섯 마디가 선 굵은 크랙으로 구성된 선인봉 학교길. 이 바윗길을 누가 개척했을까? 인수봉 학교길A와 B는 김용기등산학교의 김용기 교장이 개척했지만 선인봉 학교길은 정승권등산학교의 정승권 교장이 주축이 되어 개척한 길이다. ‘노래하는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정 교장은 1960년생으로 1988년도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여 주목을 받은 이래 1993년도에는 설악산 토왕폭을 야간 단독등반하여 산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1982년도에 선인봉 현암길을 개척했고 2003년도에 선인봉 학교길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2013년에는 학교길 개척 20주년 기념등반을 하기도 했다. 2009년도에는 인수봉의 10개 주요크랙루트를 17시간에 걸쳐 등반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정승권 교장이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등산학교를 개교하고 운영해온 것이다. 1990년 문을 연 정승권등산학교(이하 정등)는 2013년도까지 암벽반 104기, 대암벽반 11기, 빙벽반 46기 교육을 통해 수많은 산악인들을 배출해왔다.
정등은 또 졸업생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산악회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졸업등반이 주로 열리는 간현암장의 졸업식날에는 언제나 동문들로 이루어진 산악회의 임원들이 찾아와 졸업생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열리기도 한다. 정등 총동문회는 2011년, 1년 만에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여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다시 등반은 이어진다. 다섯째 마디. 거리 11미터인 이 구간은 출발지점의 크랙이 가파르게 서있기는 하지만 안전을 위해 소형 캠 2~3개를 설치하고 등반하게 되면 별다른 어려움은 없는 구간이다.
이제 또 하나의 크럭스가 기다리고 있다. 여섯째 마디. 여섯째 마디는 출발부터 손홀드와 발홀드가 애매한 멍텅구리 크랙이다. 자못 경사도가 심하기 때문에 왼발을 크랙 안으로 딛고 오른발로는 크랙 바위를 밀어 지지력을 얻은 다음 오른손으로 크랙의 아랫부분을 누르듯이 하여 밀면서 올라간다는 느낌으로 등반을 해야 한다.
드디어 윤장욱 클라이머가 여섯째 마디를 출발한다. 다소 긴장한 듯 상기된 표정을 한 그가 미끄러워서 출발이 만만치 않은 구간을 가까스로 벗어나 첫 번째 볼트에 퀵드로를 걸고 통과한다. 홀드를 정확하게 잡고 밸런스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두 개의 캠을 설치한 다음에 다시 두 번째 볼트에 퀵드로를 건다. 이번에는 크랙을 완전히 타고 올라가서 홀드를 신중히 잡고 이동하여 다시 두 번째 볼트에 확보, 마지막 확보지점까지 이동하는 그의 동작에는 거침이 없다.
팔에 다소 무리가 갈 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평소 암장운동을 게을리 했거나 오랜만에 학교길을 아무 생각 없이 등반하고자 했다면 벌써 이 구간에서 펌핑이 올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말하는 ‘펌핑(Pumping)’이란 격심한 근육운동을 계속하다보면 혈액이 더 이상 산소공급을 감당하지 못해 경련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선등자가 선등시 어려운 구간에서 펌핑이 오게 되면 일종의 공황상태인 패닉(panic)현상을 겪게 될 수도 있다. 패닉이란 등반 중에 일어나는 불안한 심리적 반응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에는 무리하지 말고 안전한 위치에 확보를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등반을 이어나가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곤궁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하지만 만약 더 이상이 등반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에는 탈출이 현명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평소 암장운동 등을 통한 근력과 근지구력 운동이 필수적이다. 또 자신의 능력에 맞는 바윗길을 등반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제 단 두 마디가 남았다. 일곱째 마디는 거리가 25미터이지만 난이도는 높지 않은 5.6. 그러나 지금까지 등반을 해오면서 체력을 많이 소모했음을 감안하여 끝까지 집중력을 잃어서는 안된다. 캠 설치 없이 두 개의 볼트를 통과하면 짧은 뜀바위를 지나 확보점에 이를 수 있다.
마지막 여덟째 마디는 독특한 사선슬랩이 이어지는 재미나는 구간이다. 난이도는 5,9 정도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선등반이다 보니 홀드와 밴드를 유심히 살피고 때로는 불안정한 홀드에 발을 올려놓고 등반을 해야 한다. 모두 열한개의 볼트가 있는 여덟째 마디는 자일유통이 잘 안되기 때문에 도르레가 달린 퀵드로를 사용하거나 슬링줄과 퀵드로를 연결하여 자일이 꺾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학교길 여덟째 마디를 출발하는 윤장욱 클라이머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나고 그의 등반모습이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깔끔하게 첫눈오름으로 학교길을 등반한 그의 느낌은 어떨까?
"언제나 등반을 시작할 때는 항상 긴장을 하게 되지만 완등을 하고 난 후의 '해냈다'는 뿌듯함이 계속 등반의 세계로 이끄는 것 같습니다. 학교길 여섯째 마디 출발지점은 오르면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면 미끄러지는 멍텅구리 홀드에 발 자리도 불안하여 등반이 만만치 않은 크럭스 구간이었네요. 등반에 자신감이 붙은 클라이머라면 꼭 한 번은 등반해볼만한 멋진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장욱 클라이머는 학교길 전 구간을 등반하면서 팔에 펌핑을 느끼거나 근지구력의 부족은 느끼지 못했고 다만 팔이 뻐근할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앞으로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인수봉 빌라길이나 울산바위 비너스길은 물론 인클길 이상의 난이도 등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니 지금까지 숨겨져 왔던 클라이머로서의 그의 진면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학교길 첫눈오름 등반을 거의 완벽하게 또 기분 좋게 완등한 윤장욱 클라이머가 하강을 한다. 학교길은 여덟 째 마디 확보지점에서 세 번의 60미터 하강을 해야 지상으로 귀환할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째 하강포인트에서 주의할 점 하나. 자일이 60미터에서 조금이라도 짧다면 두 번째 하강포인트까지 자일이 다다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첫 번째 하강구간의 거리가 거의 60미터에 꽉 찬다는 뜻이다.
그럴 때에는 바로 옆의 또 다른 하강포인트를 이용하거나 30미터 하강을 한 다음 다시 60미터 하강으로 이어가도록 하자. 쟁쟁한 클라이머들이 자일이 짧아 선인봉에서 산화한 기억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학교길 여덟 째 마디 확보지점 뒤편으로는 마치 인절미가 주렁주렁 붙은 듯한 바위가 바라다 보인다. 그 모양이 얼마나 현실감이 있는지 바윗길에서 만나고 또 떠나간 사람들을 불러다가 함께 둘러앉아 인절미를 뚝뚝 떼어내서 나누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니지,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선인봉에는 벌써 아랫자락까지 그늘이 져서 서늘한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하강을 하는 윤 클라이머 뒤편, 멀찌기 떨어진 가녘자리로 벌써 결실과 수확의 계절 가을이 찾아오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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