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이심기 기자 ] “세계 역사에서 최악의 금융위기였다.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심각했다.”(벤 버냉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경제가 정말로 수직 낙하(free fall)하던 시기였다”(티머시 가이트너 전 미국 재무부 장관)
사라진 경쟁사 ‘파이’까지 삼켜
씨티·BoA 등 대형은행 순이익
美 6900개 은행 전체의 절반
‘탐욕의 월가’에 빼든 칼
금융사 규제 ‘도드-프랭크법’ 시행
대형銀 자산 1000억弗 더 확보 압박
위기 해결사가 된 각국 중앙은행
물가 안정보다 ‘景氣 안정’ 목표
Fed·ECB 등 돈 풀기 주력
2008년 9월15일 세계 4위 투자은행(IB)이던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신청은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세계 금융시장을 재앙으로 몰아넣었다. 버냉키 전 의장이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13개 금융회사 중 12개가 1~2주 안에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밝힐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미국 5대 IB 중 3~5위 업체가 사라졌고, 4위 상업은행 와코비아도 문을 닫았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는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아 국유화되면서 간신히 생명을 연장했다. 세계 금융시스템은 마비 상태였고, 주식시장도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세계 금융시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더 세진’ 美 대형 은행
미국 은행들의 올 2분기 순이익은 402억달러(약 41조원)였다. 역대 최고치였던 작년 1분기의 403억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경기가 회복되면서 은행들의 순이익도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눈에 띄는 점은 월가를 대표하는 대형 은행들의 순이익이 미 전역 6900여개 은행이 올린 전체 이익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JP모간체이스와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6대 은행의 순이익 합계는 182억달러로 전체 은행이 벌어들인 순익의 45%를 차지했다. 제라드 캐시디 RBC캐피털마켓 수석연구원은 “금융업계가 과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갔다”고 평가했다.
‘덩치’도 금융위기 당시보다 커졌다. 씨티그룹의 시가총액은 2008년 말 365억달러에서 올 2분기 말 1590억달러가 돼 4.3배로 커졌다. 웰스파고는 와코비아를 인수하면서 자산 규모(1조5988억달러)가 금융위기 이전보다 2.7배 늘었다. 시가총액은 2008년 말 124억달러에서 올 2분기 말 2704억달러로, 씨티와 JP모간체이스를 제치고 미국 1위로 올라섰다. 정부의 압박으로 당시 3위 IB이던 메릴린치를 떠안은 BoA도 같은 기간 시가총액이 706억달러에서 1754억달러로, 자산은 1조8179억달러에서 2조1705억달러로 불어났다. 전문가들은 “대마불사(大馬不死)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미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 과정에서 사라진 경쟁사들의 ‘파이’를 챙긴 금융회사들의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높아졌다”고 말했다.
“더 이상 구제금융 안 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0년 7월 월가의 탐욕과 투기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도드-프랭크법’에 서명하면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융개혁법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3500쪽에 걸쳐 4000개 하위 법안을 담고 있는 이 법의 핵심은 금융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형 금융회사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한 것이다. 특히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역할을 분리한 ‘볼커룰(Volcker rule)’이 포함되면서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제정된 ‘글래스-스티걸법’의 부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법 시행 이후 은행에 대한 정기적인 스트레스 테스트 시행과 자본건전성 강화, 투기적 거래 제한 등이 효과를 보고 있다. WSJ는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자료를 인용, 지난해 환율 및 선물 거래 등을 통한 글로벌 대형 은행들의 수익(매출)은 1120억달러로 전년도보다 16% 줄었다고 전했다. 다만 법 시행을 위한 시행규칙 제정이 지난 7월 말 현재 50%에도 못 미쳐 ‘절반의 성공’이란 평가도 있다. ‘볼커룰’도 미완성 상태다.
Fed는 위기에 대비해 대형 은행들이 1000억달러를 더 확보하도록 하는 등 월가를 압박하고 있다.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을 높여 은행이 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 신속하게 현금화할 수 있는 특정 자산의 비중을 늘리도록 했다.
중앙은행, 소방수로 전면 부상
재닛 옐런(미국), 마리오 드라기(유로존), 마크 카니(영국), 구로다 하루히코(일본), 라구암 라잔(인도). 세계 금융시장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들은 각국(지역)의 중앙은행 총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세계 경제의 회복 여부가 이들 손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이들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물가 안정에 주력하던 과거 중앙은행 총재들과 달리 경기 안정을 위해 과감하고 선제적인 역할을 떠맡으면서 정부를 대신해 ‘위기 해결사’로 전면에 부상했다.
옐런 의장은 ‘헬리콥터 벤’으로 불리던 전임 버냉키 의장과 함께 양적완화 정책을 고안한 주인공이다. Fed는 세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를 통해 4조달러가 넘는 자금을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시중에 살포했다. ‘슈퍼 마리오’라는 별칭을 가진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중앙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시중은행의 예치금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로 장기 침체에 빠져들고 있는 유럽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다.
이들은 또 전통적인 중앙은행 비밀주의에서 벗어나 통화정책을 적극 ‘선전’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취임과 함께 금리 결정 방향을 예고하는 ‘선제 가이던스’를 도입한 카니 영국중앙은행 총재가 대표적이다.
■ ‘뒷말’ 많은 리먼 파산 뒤처리
경영진 단 한 명 처벌없이 종결
2008년 9월15일 리먼브러더스 파산이 불러온 글로벌 금융위기는 어느 정도 수습됐지만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을 둘러싼 손실 공방은 6년째 진행 중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리먼브러더스의 무담보 채권자가 46억달러를 돌려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대부분 전직 종업원과 거래 파트너로 무담보 채권자가 돈을 돌려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채권단이 돌려받은 금액은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800억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전체 채권(담보·무담보 포함)의 약 27%에 불과하며 나머지 73%는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인한 투자 손실과 관련해 최고경영진은 단 한 명도 기소되거나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은 채 모든 조사가 일단락됐다. 2011년 미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에 이어 지난해 9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리처드 풀드 전 최고경영자(CEO·사진) 등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고 조사를 종결했다.
5년의 법적 시효도 지난해 9월로 끝났다. SEC가 관련 문서 1500만건을 검토, 회계장부 조작 등의 혐의와 함께 30여명의 증인까지 확보해놓고도 이들을 고발하지 않은 채 조사를 끝내자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NYT는 SEC의 결정에 “금융 범죄를 처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또다시 보여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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