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케(Marche)는 이탈리아 중북부 동해안에 자리 잡은 주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쯤 된다. 아드리아해와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길고 긴 여름휴가를 즐기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를 빛낸 화가 라파엘로와 작곡가 로시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과 만나다
마르케의 주도는 안코나지만,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우르비노라는 도시다. 이유는 화가 라파엘로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서구 회화의 지존 자리를 지킨 인물. 1483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라파엘로는 궁정화가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자 1504년 피렌체에 입성한다. 괴팍하고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사근사근한 성격의 라파엘로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미남이었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여리고 섬세한 외모의 소유자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길고 섬세한 콧날,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는 턱, 그리고 순하고 맑은 눈.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샀던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라파엘로는 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는데 바사리에 따르면 연애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절제하지 않고 연애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르게리타 루티가 있었다. 그는 이 여인의 모습을 ‘라 포르나리나’, 그러니까 ‘빵집 딸’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그리는데 이 여인이 500여년이 지난 후에야 라파엘로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술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라파엘로의 걸작들도 감상할 수 있어
우르비노 시내에는 14세기에 지어진 라파엘로 생가(Casa di Raffaello)도 있다. 중정을 품은 3층짜리 저택에는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화구를 놓곤 했던 자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 도시이기도 하다. 유네스코는 1998년 우르비노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아마도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우르비노의 전성기를 이룩한 주인공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다. 이탈리아 최고의 용병으로 활약하던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으로 르네상스 초기에 지어진 궁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을 지었다.
몬테펠트로는 무식한 용병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다. 이탈리아 역사는 그를 ‘성공한 용병 장군’이 아닌 이탈리아의 정의(The Light of Italy)로 기억한다. 그는 궁을 장식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청했고 수많은 화가와 건축가, 공예가, 조각가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했다. 라파엘로를 비롯해 ‘회화의 군주’로 불리는 티치아노의 작품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걸작 ‘세니갈리아의 성모’ 등 눈부신 ‘르네상스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우르비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떨어진, 인구가 10만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 페사로(Pesaro). 지중해의 바다 옆에 앉은 이 다정한 도시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남자 로시니가 태어난 곳이다. 1792년 페사로에서 태어난 그는 6세에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14세에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가 첼로와 피아노,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운 곳은 볼로냐 음악학교였는데 지루한 수업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내 한쪽에는 1882년 로시니의 유산으로 세운 로시니 음악학교(Conservatorio di Musica)가 있다. 학교를 기웃거리다 어느 피아노실을 엿보게 되었는데, 호기심 어린 낯선 여행자를 발견한 학생은 ‘세비야의 이발사’의 한 대목을 신나게 연주해주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과 향긋한 와인
이탈리아 여느 지역이 자랑할 만한 와인을 가지고 있듯 마르케 역시 마찬가지. 예시(Jesi)라는 중세 도시에서는 베르키오(Verdicchio)라는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베르디키오는 ‘푸르다’라는 뜻의 ‘베르데’에서 비롯됐는데, 이 말에서 알 수 있듯 포도에는 푸른빛이 돈다. 와인잔을 코끝에 대고 깊은 숨을 들이켜면 상쾌하면서도 신맛을 가진 향이 파고든다. 베르디키오는 숙성력이 탁월해 빈티지가 좋기만 하면 10년은 너끈하게 묵힐 수 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예시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피아스트라 수도원(Abbazia Fiastra)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법률을 따르는 수도회. 수도사들은 여전히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 일반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수도원을 돌아볼 수 있다. 수도원은 1800㎡에 달하는 자연보호구역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카페, 레스토랑 등과 함께 어울려 있기 때문에 소풍온 듯 수도원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여행팁
인천공항에서 로마까지 알이탈리아 항공을 이용해 오사카를 거쳐 갈 수 있다. 안코나 공항에서 약 25분 거리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에 호텔 몬테코네로(www.hotelmonteconero.it )가 자리한다.
12 세기 수도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호텔로 재단장한 것으로 고풍스러운 외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해발 550m의 산자락에 자리한 까닭에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장점. 아드리아 해의 멋진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는 로마보다 오래된 도시다. 아링고(Arringo) 광장의 산 에미디오(San Emidio) 대성당 안에는 르네상스 화가 카를로 클리벨리의 폴립티크화가 있으며 바로 옆에 위치한 시청 내부에도 시립 미술관이 있다.
아스콜리 피체노의 뜨거운 햇빛이 부담스럽다면 시티 사이팅 열차 ‘아스콜리 익스플로러’를 타보자. 도시의 명소들을 손쉽게 돌아볼 수 있다.
마르케(이탈리아)=글·사진 < 최갑수 여행작가 ssoochoi@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