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회색빛의 런던 도심을 멋스러운 트랜치 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중년 남성의 모습일 것이다. 이때 이 남성이 입고 있는 코트를 우리는 의례 ‘버버리’ 코트일거라고 상상한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유학생일지라도 귀국 전에 버버리 코트 한 벌은 꼭 장만해서 돌아온다고 하니, 버버리가 영국의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상징하는 브랜드임에는 틀림없다. ‘버버리(burberry)’는 영국의 명품 의류 및 액세서리 브랜드로 1856년에 토머스 버버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만든 군인 장교의 코트가 트랜치 코트로 탈바꿈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1920년도에 디자인된 버버리 체크로 명품 브랜드의 입지를 다졌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버버리의 성장세는 2000년대 들어와 위기에 봉착한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2000년대 초반 영국의 극성 축구팬인 훌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예선에서 영국이 34년 만에 라이벌 독일을 제압하자 기쁨에 넘쳐 흥분한 영국 훌리건들이 난동을 부렸다. 이날 하루에만 150명이 체포됐고 영국이 ‘축구 깡패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훌리건이 자신들의 상징적 아이템으로 버버리 제품을 입었단 점이다.
이 무렵부터 영국의 ‘채브(chav)’도 버버리 제품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 버버리 체크가 포함된 옷과 모자, 액세서리를 온 몸에 치장하고 다녔다. 채브란 영국의 십대를 비롯한 청소년 문화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노동자 계급의 배경과 상업주의와 혼합돼 나타난 문화다. 일종의 영국 비행청소년 문화인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들이 길거리에서 술과 마약을 하고, 폭력을 일삼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관경이다. 이들로 인해 버버리의 브랜드 가치는 급격하게 추락했다.
‘디자인 혁신’으로 위기 탈출
하지만 버버리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에 직면했지만, 이를 역발상으로 극복했다. 과감하게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버버리 체크를 감추기로 한 것이다. 명품 시장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가 명품을 상징하는 디자인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버리는 고유의 체크무늬를 안감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다시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혁신’이라고 하면 기술적인 측면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버버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디자인과 같은 심미적인 요인을 통한 혁신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 디자인 경영, 서비스 디자인 등이 모두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개념들이다. 이런 디자인 혁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인공들이 바로 ‘디자인 컨설턴트’다.
사실 디자인 컨설턴트의 역사는 길다. 이들이 처음 나타나게 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다. 전후 복구를 위한 미국의 대규모 투자와 대(對)유럽 수출 증가로 인해 미국의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를 반영하듯 당시 기업들은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에 집중하는 한편 높은 이윤을 위해 판매는 늘리고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규격화와 합리화, 기술혁신 등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 시기 눈에 띄는 점은 바로 ‘광고를 통한 제품의 홍보’였다. 광고로 인해 제품의 시각적 이미지가 중요해졌고, 이 시기 디자인이 적은 비용으로 판매를 높일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디자인 컨설턴트는 이러한 사회적 요구로 인해 등장한 직업군으로 최근 부상한 ‘디자인 경영’으로 인해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소비자·생산자 잉여’ 극대화
디자인 경영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기업의 경영성과에 디자인적 요인들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기업의 가격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투입되는 재료(생산요소) 비용에 합리적인 기업의 이윤을 얹어 설정하게 된다. 한편, 모든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의 이면에는 ‘이윤극대화’라는 목표가 내재돼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경제학에서의 원칙에 의해서만 가격을 설정하게 되면 이윤극대화 달성이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면 더 높은 이윤을 얹어 판매하려고 노력한다. 즉, 경제적 가치(가격)와 실제 판매가치(가격)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디자인 경영의 핵심으로 디자인 컨설턴트가 다시 주목을 받는 이유도 디자인과 이를 경영활동에 활용하는 이들의 전략이 큰 비용의 투입 없이도 그 차이를 가장 크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 높은 가격을 설정할 수는 없다. 시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려면 일정한 원칙 내에서 가격을 설정해야 하는데, 경제학에서는 그 원칙으로 ‘소비자 잉여’와 ‘생산자 잉여’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제품의 가격을 중심에 두고 소비자가 느끼는 제품가치와의 차이가 소비자 잉여가 되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투입원가와의 차이가 생산자 잉여가 된다는 설명이다. 즉, 생산자 입장에서는 판매한 상품가격은 항상 상품을 만들기 위해 투입한 원가보다는 높아야 하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구입한 상품으로부터 느끼는 가치는 지급한 상품가격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가 상품으로부터 느끼는 만족감이 커질수록 높은 가격을 설정하면서도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며, 이러한 디자인의 역할을 극대화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디자인 컨설턴트인 것이다.
서비스 디자인한 ‘지니어스 바’
최근 들어 디자인 컨설턴트의 역할은 디자인적인 사고 차원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제품의 심미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소비자가 상품으로부터 느끼는 만족감을 높이는 방법은 한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방법이 소비자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애플이 운영하는 ‘지니어스 바(Genius Bar)’가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에서는 수리인력의 높은 인건비로 인해 많은 경우 우편배송을 통해 전달되어 수리된다. 하지만 애플은 비싼 몸값의 수리 인력들을 상시 고용해 애플스토어 내의 지니어스 바를 운영했다. 높은 운영비용으로 인해 수리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모두가 실패를 점쳤지만, 엄청나게 많은 소비자들이 지니어스 바를 이용했다. 애플은 2012년 미국에서 단위 면적당 매출액이 가장 높은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제품이 아닌 서비스를 디자인한 결과였다. 즉 애플스토어를 제품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자의 발전을 돕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제품에 관한 어떠한 문제도 편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디자인 컨설턴트의 역할은 고객이 상품과 만나는 순간의 첫인상을 높이는 데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지속적인 만족을 이끌어내 판매뿐만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점에도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20년대 이후 관심이 낮아진 디자인 컨설턴트의 활동이 재조명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상품과 서비스 생산 영역이 이들의 활동무대가 된 것이다. 작년 10월 애플이 영입한 새로운 CEO가 바로 버버리의 위기를 극복한 디자인 경영자인 안젤라 아렌츠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이들의 창의적인 문제해결 방식을 지켜보는 일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들의 보다 다양한 활동을 기대해본다.
● 소비자 잉여와 생산자 잉여
소비자 잉여는 제품의 가격과 소비자가 느끼는 제품가치와의 차이를 의미하는 반면, 생산자 잉여는 가격과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투입원가와의 차이를 의미한다.
김동영 < KDI 전문연구원 kimdy@kdi.r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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