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글에 딴죽걸기

입력 2014-10-09 23:32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올해 한글날 잔치도 시끌벅적하다. 지난해부터 공휴일 지위를 회복한 덕분인지 언어의 성찬은 더 화려하다. 국무총리는 경축식에서 “외국인들의 한국어 배우기 열풍을 북돋우기 위해 ‘한글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늘 이 때만 반짝 요란을 떨다 금방 잊어버린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에 딴죽을 거는 일은 발칙하다. 그러나 고민해봐야 할 것도 많다. 우선 ‘한글 세계화’를 추진하려면 다양한 소리를 충분히 표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그게 쉽지 않다. 560여년 전에 이미 ‘훈민정음은 닭울음 소리까지 적는다’고 했는데 왜 그럴까. 훈민정음 본래의 28자를 24자로 무리하게 줄인 탓이다. 일제시대에 만든 외래어표기법이 발음을 일본식에 가깝게 단순화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없어진 것은 16세기 말까지 쓰이던 반시옷(ㅿ)을 비롯해 옛이응(ㆁ), 여린히읗(ㆆ), 아래아(ㆍ) 4자다.

더 아쉬운 것은 순경음이다. 영어발음 표기 때 애를 먹는 f는 순경음 피읖(ㆄ), v는 순경음 비읍(ㅸ)을 활용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순경음 비읍은 광복 직후까지 일반인들의 편지와 문서에 많이 쓰였고 경상도 말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채택하면서 순경음 비읍을 추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된소리를 금지하는 획일적 규제 또한 문제다. 그 결과 옐찐은 옐친이 되고 뿌쉬낀은 푸시킨, 돈 끼호테는 돈 키호테가 돼버렸다.

단순 맞춤법 오류는 더하다. 학생을 가르친다는 학원마저 합격률을 ‘합격율’로 버젓이 써놓고 부끄러운 줄 모른다. 무분별한 사물존칭은 어떤가. ‘커피 나오십니다’ ‘그 상품은 품절이십니다’ ‘고장이 나시면’ 같은 코미디가 난무한다. 더 심각한 것은 개념어 부족 문제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 약 51만개 중 고유어는 25.5%에 불과하다. 예컨대 hindsight(일이 다 벌어진 뒤 늦게야 깨달음), headstart(한 발 앞선 출발, 남보다 일찍 시작해서 갖는 유리함) 같은 단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할까.

한글은 역사가 짧다. 언어는 문화가 만든다. 그러다보니 주요 개념어는 모조리 한자이거나 지금은 영어다. 개념어는 문명의 결과물이다.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개념어를 만들어 나간 역사는 눈물겹다. 물론 한글의 흠을 잡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과도한 자기중심적 해석은 하지 말자는 뜻이다. 문명을 선도하면 문자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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