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중단 후에 수립된 대한제국은 ‘재정 능력’ 증대의 방법도 갑오개혁과 크게 달랐다. 대한제국은 결호전, 즉 결전(지세)과 호포전(호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재원을 황실 재정으로 집중하고자 했다. 시차를 두고 이뤄졌지만, 역둔토 등의 각종 국유지, 홍삼 전매사업, 금광을 비롯한 광산, 균역청에서 관할하던 어염선세, 상업 관련 ‘무명잡세’, 독점권을 행사하는 특권회사들이 모두 궁내부, 특히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으로 속속 집중됐다. 갑오개혁 정부는 상업 관련 조세 대부분을 ‘무명잡세’로 간주해 폐지했으며 국유지는 민간에 불하할 계획이었지만, 대한제국은 국가에 연고가 있어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명목을 불문하고 황실 재산으로 만들거나 과세하려고 했다.
황실 수입 비대 정부 총수입의 절반
황실에는 이 밖에도 ‘황실비’ 및 ‘궁내부비’로 편성돼 국고에서 지급하는 황실 경비가 있었다. 자체 수입과 황실 경비를 합한 황실 수입의 크기는 정부 총세입의 절반은 족히 됐다. 1905년의 개략적인 조사에 따르면 황실의 1년 수입은 국고에서 지급하는 165만여원(元)과 내장원 수입 326만원을 합한 491만여원으로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 실수입의 69.6%(1903년), 43.9%(1904년)에 달하는 규모였다. 내장원 수입이 국고에서 지급하는 수입보다 더 많아 전체 황실 수입의 66.3%를 차지했다.
황실 수입이 국가 재정에 비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같은 시기의 일본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그림). 1896~1904년 사이에 한국은 총세출에서 차지하는 황실 경비의 비중이 최저 9.02%(1896년), 최고 15.5%(1897년)였으나 일본은 각각 1.02%(1900년), 1.78%(1896년)에 불과했다.
대한제국의 황실 경비가 일본 황실 경비의 20~30%대, 1904년에는 최대 71.8%에 달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총세출은 일본보다 1897년에 1.87%, 1901년에 3.40%, 1904년에 5.13%로 조금씩 따라가고는 있었지만 매우 작았다. 재정 규모에 비해 국고에서 지급하는 황실 경비가 매우 컸던 것인데, 자체 수입을 포함한 황실 총수입은 일본의 53.8%(1904년), 46.3%(1905년)에 달했다.
격식 높이는 비용 커 황실 재정 비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이 이렇게 컸던 이유는 우선 조선왕조부터 재정에서 왕실 관련 경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데다 대한제국 수립 후 제국으로서의 격식을 높이는 비용이 추가로 지출됐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한제국의 국왕과 궁내부의 기능이 일본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했다. 일본은 내각이 국정을 주도했지만,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에 의해 전제군주제가 수립돼 국왕이 국정 전반을 주관했다. 그러다 보니 국왕 직속기관이 증가하고 궁내부 조직도 크게 팽창했다. 1904년에 이르면 궁내부 산하 기관이 약 30개로 늘어났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궁내부 경비가 모두 황실 재정의 중추기관인 내장원의 수입으로 충당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궁내부에 소속된 기관 중에 철도원, 서북 철도원, 광학국, 경위원, 각 개항장 경무서, 예식원의 경비는 총예산에 편성돼 국고에서 지급받았다. 그렇다면 내장원 수입은 어디에 지출했을까?
내장원 『회계책』(1896~1907)에 따르면 국왕이 자유롭게 사용한 것이 65.1%였고(內入), 그중 6할은 사용처를 알 수가 없다(총액의 37.7%). 사용처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물품 구입(16.5%), 평양탄광, 경편 철도, 광학국, 수안 금광, 역둔토, 홍삼 전매 등의 궁내부 사업비(12.8%), 진상, 제사, 장례 등의 의례비(10.2%)로 지출했다. 그밖에 하사·구휼금(1.4%), 학교 및 유학생 지원(0.9%)에도 쓰였다. 이와 같이 내장원 수입 대부분을 국왕이 자유롭게 사용했다. 황실은 그러나 전환국까지 국왕 직속기관으로 둠으로써 화폐(백동화)를 발행하고 주조 수입까지 얻을 수 있었다. 백동화 발행은 ‘대한국국제’가 발포된 1899년 이후에 급증했다.
정부 재정까지 황실 경비로 누출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은 이와 같이 재정적 자율성을 확보해 군주의 전제권력을 뒷받침하고자 했으나 그 여파로 탁지부가 관장하는 정부 재정이 영향을 받았다. 일단 탁지부의 국고 실수입은 1897년 487만여원에서, 1903년에 706만여원, 1904년에 1120만여원으로 늘어 재정 능력이 상당히 증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99년 이후 백동화가 다량 주조되어 백동화 가치가 1899년에 비해 1904년에 절반 수준으로 하락해 명목 세입의 증가를 그대로 실질 세입의 증가로 해석하기는 곤란하다. 1901년과 1903년에 지세의 세율을 각각 2/3, 3/5 인상한 것도 인플레로 인한 실질 수입의 감소를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시기 정부 재정은 조세 미납으로 인해 실수입이 예산의 7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다 황실로부터 강요되는 예산 외 지출이 많아 재정 압박은 더욱 심했다. 1901년에는 황실 경비의 예산 외 지출이 예산액의 무려 63.5%에 달했다.
주로 능, 전각 수축 비용, 명성황후(민비)의 장례비 등 황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지출이 많았다. 황실 관련 경비였지만 궁내부 수입이 아닌 정부 재정에서 충당한 것이다. 예산을 지키지 않은 것도 문제였지만 이러한 황실 관련 경비를 탁지부를 통해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궁내부 대신이 국왕에게 직접 청해 집행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제도적으로 국가 재정 운영에 대한 국왕의 자의적 개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수입은 예산만큼 들어오지 않는데 이러한 방만한 경비 지출로 인해 결국 정부 재정으로 관리들의 봉급을 지급하기도 곤란한 지경에 이르자 1902년부터 탁지부가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으로부터 거꾸로 돈을 빌린 다음 내장원이 지세를 직접 징수해 가도록 했다. 조세금납화 이후에 확산된 ‘군수 등 지방관이 징수한 조세를 국고에 납부하기 전에 탁지부가 지시하는 제3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외획’(外劃)의 관행이 내장원을 상대로 대규모로 이뤄진 것이다. 외획의 규모가 가장 컸던 1903년 탁지부는 내장원에 삼남지방의 지세 1/3에 해당하는 1000만냥(200만원)을 징수해 가도록 허락했다. 내장원은 지방관으로부터 받은 세금으로 쌀을 구입해 서울에서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본래 탁지부와 지방관이 관할하던 결호전(지세와 호세)은 황실 재정이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나 정부 재정의 곤란을 기회로 삼아 결호전에까지 손을 뻗친 것이다. 황실은 내장원에 각종 재원을 집중하는 동시에 백동화를 발행하는 전환국까지 지배함으로써 재정의 자율성을 확보했을지 모르나 국가 재정의 근간을 흔드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내장원경 이용익(1854~1907)이 탁지부 대신 서리까지 겸해 내장원이 마치 ‘정부의 은행’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처럼 탁지부에 대출을 해주고, 징세기관이 돼 조세를 징수하는 특유의 재정제도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 확충은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국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한 내장원도 ‘외획’으로 받은 지세를 1902년에 7할 정도, 1903년도에는 겨우 1/4 정도밖에 징수하지 못했다. 상인에게 세금을 맡겨 이익을 취하는 지방관 및 이서층의 기득권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대한국국제’에 표명된 전제권력으로도 지방재정을 장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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