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서 기자 ] “자율적으로 하라고 하는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정부에서 지시를 내려 주겠죠.”
금융위원회가 금융회사별로 보안대책을 알아서 마련하고 사고가 터지면 각자 책임지는 방식으로 보안 관련 규제를 대폭 손보겠다고 발표하자 한 대형은행 부행장이 내놓은 반응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주 판교신도시에 있는 카카오 본사를 찾아 업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은행 컴퓨터에 화면 보호기를 깔아야 한다는 것까지 세세하게 정해 놓은 보안 규정을 대폭 완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꼭 필요한 규제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전부 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액티브X, 방화벽, 백신 등 이른바 ‘보안 3종 세트’ 의무화 규정도 없어진다. 금융당국이 미주알고주알 지도해주다 보니 금융회사들이 규정을 지키는 데 급급해 새로운 보안기술 개발에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규제가 없어진다’며 환영하기보다 ‘갑작스런 지시에 뭘 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게 금융회사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조금 있으면 슬그머니 가이드라인이 나올 테니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는 냉소도 많다.
이 같은 비판적인 시각에 금융당국이 오히려 당황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대책을 내놨는데 금융회사들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면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유도하면 자율성을 부여하겠다는 취지 자체가 퇴색된다”며 난감해 했다.
‘알아서 하라’는데도 당국 지시를 기다리겠다고 나서는 행태는 일차적으로 금융사들의 ‘보신주의’ 때문일 것이다. 금융당국이 내린 규정만 지키면 사고가 나더라도 상당 부분 책임을 피할 수 있는데 굳이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금융권에 만연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금융당국도 근본적인 책임을 피해가기 어렵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사소한 문제에도 온갖 대책을 내놓으면서 금융당국이 ‘관치(官治)’를 해온 결과”라고 진단했다. 자율성 부여가 진심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일관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박종서 금융부 기자 cosm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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