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주지도 않은 돈을 달라고 떼쓰던-그런 심정을 아는가, 너는 그런 심정을.(…)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
1950년대 마산상고를 졸업한 원로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의 고백처럼 상업학교를 택했던 청춘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운명을 개척해야 했다.
전쟁 직후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상고에는 가난한 수재들이 몰렸다.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부산상고(현 개성고)·동지상고(현 동지고)는 3연속 대통령을 배출했다. 강경상고(현 강경상업정보고)·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광주상고(현 동성고)·경기상고·경남상고(현 부경고)·군산상고·대구상고(현 상원고)·대전상고(현 우송고)·덕수상고(현 덕수고)·마산상고(현 용마고)·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제주상고(현 제주중앙고)도 명문으로 꼽힌다.
상업학교의 특성 때문에 졸업생 중 경제계 인사가 많다. 동대문상고를 졸업한 강덕수 STX그룹 회장을 비롯해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강경상고), 이학수 전 삼성 미래전략실 부회장(부산상고), 정연주 전 삼성물산 부회장(대구상고),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선린상고) 등 굵직한 인물이 즐비하다.
정계 인물은 동지·목포·대전·강릉·마산상고 등에서 많이 나왔다. 동지상고는 MB계, 목포상고는 동교동계가 주류다. 문인 중 소설가 복거일(대전)·이순원(강릉)·심상대(강릉), 시인 김수영(선린)·황학주(광주) 등이 상고를 나왔다. 이른바 ‘파워 엘리트’의 숫자만 놓고 보면 119년 전통의 부산상고가 1위이고 대구·선린·덕수·경기 등이 뒤를 잇는다. 이들의 입신양명 비결은 뭘까. 학자들은 산업화 시대의 ‘강한 성취동기’를 먼저 꼽는다. 그다음은 ‘경험의 폭과 친화력’이다. 15대 대선에서 목포상고의 김대중 후보가 경기고의 이회창 후보를 이기고, 16대 경선에서 부산상고의 노무현이 경기고의 김근태를 꺾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회계학적 소양까지 겸비했으니 엘리트의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어제오늘 화려한 조명을 받은 인물은 은행원 40년 만에 수장이 된 ‘상고 출신 천재’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다. ‘상고 출신 천재’라는 다소 오글거리는 문구는 그를 삼고초려 끝에 스카우트한 고(故)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직접 쓴 것으로 유명하다. 광주상고 졸업 후 외환은행에서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공인회계사와 행정고시까지 넘은 그의 입지전적 스토리도 드라마틱하다. 상고 전성시대만큼이나 우리 경제도 활력을 빨리 찾으면 더 좋겠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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