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우 기자 ] 지난 6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인터스텔라’(사진)는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이상 기후로 멸망 위기에 처한 인류가 지구 대신 살 곳을 찾기 위해 우주로 떠나는 내용이 영화의 골격이다. 상영시간이 세 시간 가까이 되지만 놀런 감독의 전작들처럼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퍼즐을 짜맞추듯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스토리가 가장 큰 원동력이었겠지만.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을 때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영화 내내 화면을 채우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었다.
영화는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웜홀과 블랙홀, 5차원 세계 등 그동안 순전히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개념들을 시각화해낸다. 우주선이 웜홀을 통과하는 모습이나 블랙홀 주변의 공간이 빨려들어가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손꼽을 만하다.
○일반 상대성 이론 반영한 인터스텔라
인터스텔라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science fiction)영화에 해당될 것이다. SF는 흔히 ‘공상과학’으로 번역되지만 ‘공상’의 사전적 정의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려 본다’란 점을 생각해 보면 적확한 단어는 아니다. SF는 기본적으로 과학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캐나다의 SF 작가 로버트 J 소여는 “현재에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루는 장르”라고 했다. 용이 날아다니고 마법으로 싸우는 ‘판타지’와 달리 과학적·공학적 개연성을 기반에 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인터스텔라 역시 과학적 근거를 두고 만들었다. 웜홀을 통해 멀리 떨어진 다른 은하계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은 이론물리학자이자 영화 자문으로 참여한 킵 손 박사의 1988년 논문 ‘시공간의 웜홀과 항성 간 여행에서의 그 유용성’의 도움을 받았다. 논문은 우주에 있는 웜홀을 통해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근처에선 시간이 늦게 흐른다는 영화 속 내용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통해 입증된 것이다. 놀런 감독의 동생이자 각본가인 조너선 놀런은 이 영화의 각본을 쓰기 위해 4년 동안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상대성 이론을 공부했다. 영화에선 지금까지 알려진 납작한 디스크 형태가 아닌 밝게 빛나는 빛이 블랙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우주를 소재로 한 영화에 등장한 그 어떤 블랙홀보다 실제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블랙홀 근처의 거대한 중력이 시공간과 빛을 어떻게 휘게 만드는지 계산해 시각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결과는 천문학계와 컴퓨터 그래픽 업계에서 각각 논문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영화가 공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다.
○SF는 미래를 예언할까
인터스텔라가 과학계에 논문을 더한 것처럼 SF는 종종 미래를 예언하기도 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전격Z작전’의 자동차 ‘키트’를 연상시키는 무인자동차가 이미 도로를 돌아다니고 있다. 1960~1970년대 활동한 SF 소설가 필립 K 딕의 단편을 바탕으로 만든 2002년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허공에서 손짓으로 컴퓨터를 조작하거나 사람의 홍채를 인식해 맞춤 광고를 내보내거나 보안에 이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기술들도 현실화됐거나 현실화를 앞두고 있다. 스티븐 호킹은 “한때 SF에 지나지 않던 상상 속의 산물들이 과학적 사실(scientific fact·SF)로 판명되는 것을 생각할 때 현재 기술의 한계일 뿐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은 많다”고 말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우연히 SF에 등장한 것들이 현실로 만들어진 것인지, 반대로 SF가 기술 발전의 방향을 이끄는 지침 역할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영화를 현실로’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다수 SF영화나 소설이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SF소설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각각 공포와 원초적 욕망의 자극이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 나온 지 70~80년이 흐른 지금의 사회에서 두 소설의 모습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인터스텔라가 보여준 우주 장면에 희열을 느끼지만 전 지구적 식량 위기로 인류 멸망을 목전에 둔 영화의 배경이 계속 신경 쓰이는 이유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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