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36) 수출지향 공업화와 급속한 경제성장

입력 2014-11-21 17:22  


산업혁명 이후 선진국과 후진국의 생활수준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개항으로 이러한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세계에 들어간 우리나라는 공업화에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왜 19세기 후반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20세기 후반에는 가능하게 됐을까?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나라 안팎의 수많은 요인이 절묘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후진국에서도 공업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환경이 제공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의 공업기술이 고도화되고 임금이 급속히 상승하게 됨에 따라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은 채산이 맞지 않게 됐다. 공장을 후진국으로 옮기거나 로열티를 받고 기술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경공업부문뿐만 아니라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와 같은 중화학 공업부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이 선두에서 한국과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를 이끄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의 공업화가 진행됐다.

1960년대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채택

이러한 국제환경을 잘 이용할 수 있는 공업화 전략이 수출지향 공업화였다. 후진국의 공업화 전략은 수입품을 국산품으로 대체하는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과 해외시장에 판매할 목적으로 생산하는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후진국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택했다. 높은 관세 장벽으로 유치산업을 보호함으로써 공업화를 달성하고 자립 경제를 만들려고 했다.

문제는 좁은 국내시장의 소비를 충족한 이후에는 생산을 증대하기 어렵고, 소비재 부문의 공업화 후에 부품, 기계, 소재 산업과 같은 중화학 공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두터운 보호로 인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는 산업이 발전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는 공업화에 필요한 원료, 부품, 기계를 자체 생산할 수가 없었고 외화도 부족했기 때문에 원조 물자를 이용해 면공업, 제분공업, 제당공업과 같은 수입대체 산업이 성장했다. 관세율도 높았고 원조물자의 국내 가격을 낮추기 위해 원화가치가 시장보다 높게 책정됐기 때문에 수입을 조장하고 수출에는 불리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0년대 전반에 수출지향 공업화로 전략을 전환한 것은 수입대체 공업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제경쟁력이 있는 공업을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수출지향 공업화는 해외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부문에서부터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서 농촌의 과잉 노동력을 도시의 공업 부문으로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업화와 함께 농가소득도 함께 상승했다.

돌이켜 보면 수출지향 공업화는 노동이 풍부한 후진국에 적합한 공업화 전략이었지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립 경제를 위한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뿐 수출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도에 ‘수출 제일주의’로 전환한 것은 외화 부족의 곤란을 수출을 통해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7년부터 무상 원조가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형편없는 국가신용으로는 차관도입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양철판, 합판, 면직물이 괄목할 수출 실적을 올리는 것을 보고 수출에 활로가 있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던 것이다. 수출할 1차 산품이 많았거나 원조가 계속됐다면 수출지향 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는 점에서 역경이 도리어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다.

한·미·일 삼각무역이 수출증대에 큰 기여

한편 일본에서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우리나라로 생산거점을 이전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전경련도 1963년에 일본으로 산업조사단을 파견해 우리나라로 이전할 공업을 찾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5년의 ‘한일협정’에 의한 국교 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우리나라로 이전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61년에 1900만달러에 불과했던 대일 수출이 1965년에는 4400만달러로 늘어나고 1970년에는 2억3600만달러로 급증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일협약’으로 일본으로부터 제공된 ‘대일 청구권’ 자금(무상원조 3억달러, 공공차관 2억달러, 그리고 3억달러의 상업차관)은 감소하는 원조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자금 일부가 포항제철 건설에 사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급속한 공업화와 수출 증대는 일본 제조업의 이전, 한·일기업의 합작과 기술제휴, 그리고 일본의 부품과 기계를 수입해 제조한 공산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한·미·일 삼각무역에 힘입은 바 컸다.

우리나라의 공업화가 일반적인 다른 후진국과 다른 점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머물지 않고 빠른 속도로 중화학공업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에 이루어진 급속한 중화학 공업화는 국내 수요 증가에 기인하는 점도 있었지만, 강력한 의지를 가진 국가의 산업정책에 의해 강행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1960~1975년), ‘닉슨 독트린’(1969년),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1960년대 말부터 심각해지는 안보상황과 정권교체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를 수립한 후에 1973년 1월에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였다. 6월에는 철강, 비철 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공업을 6대 전략 업종으로 집중 육성함으로써 1981년까지 1인당 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겠다는 중화학공업화 계획을 발표했다.

1970년대 혼돈의 국제정세속 중화학 육성 계획 마련

중화학공업화는 급속도로 진행돼 1977년에 목표를 달성하고 산업구조와 생활수준을 크게 변모시켰다. 1970년과 1985년을 비교하면 1인당 GDP는 253달러에서 2242달러로, 수출은 8억3500만달러에서 302억8300만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중공업 비중이 46%에서 62%로, 수출에서 차지하는 중공업 비중은 13%에서 48%로 급증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정부는 국가가 소유한 은행을 통해서 중화학 분야 수출 기업에 집중적으로 자금을 지원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성장했다. 1970년대 말 외채 누적과 과잉투자로 문제가 드러났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 ‘3저 호황’을 맞아 수출의 주역이 됐으며 한국 경제는 중진국으로 진입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1960~1970년대에 이루어진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 성장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같이 국가가 시장과 기업의 역할을 대신한 것도 아니었으며, 시장과 기업에 맡겨둔 결과도 아니었다. 공업화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국가와 리더십, 그리고 국내시장에 머물지 않고 해외시장을 개척했던 능동적인 기업가가 긴밀하게 협력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성과였다.

수출 실적이라는 해외시장의 평가에 따라서 자원을 배분했던 것도 산업정책이 가지기 쉬운 비효율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공업화에 필요한 원료, 부품, 기계, 자본을 수입하고 기술과 지식을 배우는 것을 허용했던 국제환경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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