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화법은 국회 마비법"이라며 헌법소원 외치던 새누리당
예산안 처리엔 방패막이로 사용
선진화법 옹호하던 새정치연합
궁지 몰리자 '국회 보이콧'…법안 처리땐 저지용으로 활용할 듯
[ 은정진 기자 ]
개정 국회법.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등으로 제한하고 상임위원회에서 통과가 안 되는 쟁점 법안은 ‘안건 신속처리제도’를 통해 본회의에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이용하려면 해당 상임위원 5분의 3 이상 또는 전체 국회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국회에서 ‘몸싸움’을 막겠다고 만들어진 국회선진화법(개정 국회법)이 여야 모두에 번갈아 타격을 주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누리과정(만 3~5세 영유아 무상보육) 예산 및 담뱃세 증세 등을 놓고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야당과 합의가 불발되더라도 선진화법을 내세워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을 법정기한 내 처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각종 정쟁이 있을 때마다 매번 선진화법을 무기로 삼았던 야당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국회 선진화법은 19대 총선을 앞둔 2012년 여야가 합작해 만들었다. 당시 새누리당에선 황우여 원내대표, 남경필 황영철 김세연 의원 등이 속한 ‘국회 바로세우기 모임’이, 새정치민주연합에선 김진표 원내대표와 김성곤 원혜영 김춘진 의원 등이 만든 ‘민주적 국회 운영을 위한 모임’이 법안 통과를 주도했다.
여야 간 이견이 있는 법안이 처리되려면 ‘5분의 3 이상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선진화법 규정 때문에 다수당이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더라도 정치적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새누리당은 그동안 국회선진화법을 ‘국회마비법’이라며 비판해왔고,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는 방안까지 추진하고 있다.
그렇지만 새누리당은 예산 정국에서 선진화법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새누리당과 정의화 국회의장은 여야가 합의하지 못하면 선진화법에 근거해 12월2일까지 단독으로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을 처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여당의 주요 민생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선진화법을 내세웠던 야당은 완전히 뒤바뀐 처지에 난감해하고 있다. 우윤근 새정치연합 원내대표가 “국회선진화법의 취지는 여야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의회민주주의 정신을 지키라는 것이지 직권상정, 날치기하라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등 지도부가 반발하고 있지만 딱히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새정치연합이 지난 26일 “누리과정 예산 세부 규모에 대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았다”며 모든 상임위 일정을 보이콧한 것도 선진화법 탓에 마땅한 저지 수단이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각종 예산안과 부수법안이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면 법인세 인상, 사·자·방(4대강 사업, 자원 외교, 방위산업 비리) 국정조사 등 야당의 주요 협상카드를 여당에 내밀 수조차 없게 된다.
새정치연합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위헌이라고 하면서 예산안 자동부의 조항은 유효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27일 “선진화법에 있는 예산안 자동부의 조항은 원래 헌법에 12월2일까지 통과하도록 한 헌법사항이자 이전부터 국회법에 명시돼 있던 사항”이라고 반박했다.
예산안 정국에서 새누리당의 의도가 관철된다 하더라도 ‘끝’이 아니다. 정기국회 막판 법안 처리 국면에선 또다시 새정치연합에 ‘칼자루’가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새정치연합이 선진화법을 무기 삼아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공무원연금 개정안과 각종 경제활성화법 처리에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보이콧을 선언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둔 명분 쌓기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새누리당이 또다시 코너로 몰리게 된다. 선진화법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여야 모두에 ‘자승자박’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선진화법
개정 국회법.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등으로 제한하고 상임위원회에서 통과가 안 되는 쟁점 법안은 ‘안건 신속처리제도’를 통해 본회의에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이용하려면 해당 상임위원 5분의 3 이상 또는 전체 국회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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