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아침. 서울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을 나와 허름한 육교를 건너니 고시학원과 고시원이 빽빽이 들어선 ‘고시촌’이 보였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무릎 나온 운동복 바지를 입고 두꺼운 책을 여러 권 든 채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고시생이 눈에 많이 띄었다. 용인대 태권도학과를 졸업한 김모씨(30)는 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이날 처음 노량진을 찾았다. 학원에 등록하고 고시원으로 짐을 옮긴 김씨는 “취업을 해도 언제 ‘나가라’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 요즘 아니냐”며 “철밥통 소리를 들어도 공무원이나 교사만큼 안정적인 직업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청년층 공시·고시족 35만명 육박
공시·고시족은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다. 청년층을 포함해 지난해 공무원 시험과 초·중등교원 임용고사를 치른 사람은 총 34만5706명이다. 9급 공무원 시험을 본 인원은 사상 처음으로 20만명을 넘어서며 5년 전(13만7639명)에 비해 48.7%나 많아졌다. 지난해 9급 공무원시험 경쟁률은 74.8 대 1이었다. 35만명에 육박하는 공시·고시족들은 노량진 고시촌 등에서 하루 15시간 넘게 공부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시험에 붙는 사람은 소수다.
공무원 다음으로 취업 준비생이 많이 몰리는 곳은 근무환경과 보수가 좋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대기업이다. 하지만 들어가기가 ‘바늘구멍’이다. 2012년 8월과 작년 2월 국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 수는 36만4454명. 하지만 지난해 국내 10대 그룹에서 뽑은 정규직 신입사원은 대졸자의 8.3%인 3만549명에 그쳤다. 각각 5500명과 1200명을 뽑은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의 작년 하반기 공채에는 10만명씩 몰렸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이들이 모험정신을 살려 창업을 하기에는 국내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 불확실성이 크다”며 “안정적인 직장에 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창조경제’ ‘창업국가’라는 구호는 요란하지만 창업에 뛰어드는 청년은 오히려 줄고 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지난해 30세 미만 청년층이 세운 신설법인은 3390개로 2012년(3510개)보다 120개 줄었다. 한국경제신문과 모바일 리서치업체 오픈서베이가 대학생 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도 ‘재학 중이나 졸업 후 창업할 의사가 있다’고 답한 대학생은 10.4%(52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창업할 의사가 있다고 대답한 대학생 중에서도 치킨집, 카페 등 자영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절반을 차지했다.
이채원 서울과학기술대 창업교육센터장(글로벌경영학과 교수)은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은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와 창업해 성공한 사례”라며 “우리 사회에는 ‘창업=실패’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다”고 지적했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교육 절실”
젊은층의 도전정신이 약해지고 편한 것만 찾는 사회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기업가 정신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과 유럽 각국은 초·중·고교에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교과목을 신설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사례를 찾기 힘들다. 경영대학원(MBA)도 마찬가지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한국과 미국의 주요 10개 대학 MBA 교과목을 비교한 결과 한국은 기업가 정신 관련 교과목이 ‘벤처기업과 벤처캐피털(KAIST)’ ‘창업과 벤처전략(고려대)’ 등 24개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는 과목이 173개에 달했다. 미국 MBA에는 경영 모델, 기회 창출 등 기술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벤처기업 설립의 딜레마(MIT)’ ‘사회적 기업가 정신(노스웨스턴대)’ 등 세분화되고 심층적인 강의가 개설돼 있다.
이채원 센터장은 “창업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내는 기업가 정신에 관한 커리큘럼을 만들어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집안이 몰락하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현실도 창업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하나다. 한경이 오픈서베이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창업을 꺼리거나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2.6%가 ‘한 번 실패하면 개인 파산으로 이어지는 등 재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정부가 청년 창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묻는 질문에서도 응답자의 40.6%가 ‘실패 후 재기 가능한 환경 조성’을 꼽았다.
<한국경제신문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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