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정민 기자 ] 법무법인에 다니는 이혜란 과장(35세·가명)은 본인을 '제조·직매형 의류(SPA) 매니아'라고 부른다. 유행에 맞춰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을 듣지만 SPA 브랜드를 활용해 옷값 부담은 크지 않다고 자부한다. 백화점 여성복 층을 돌며 스타일과 가격대를 파악한 후 SPA 매장으로 옮겨 옷을 구입한다.
이 과장은 "백화점 여성복 브랜드는 니트 한 장에 20만~40만 원대인데 SPA에선 같은 가격으로 대여섯장을 살 수 있다" 며 "소재나 바느질 등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으나 저렴하게 구입해 한 해 입고 유행에 맞춰 새 옷을 구입한다"고 말했다.
한국 패션업계에서 SPA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지 10년, SPA는 컨템퍼러리와 함께 패션시장의 '주류'가 됐다. 한국 진출 10년을 맞은 유니클로는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제치고 단일 패션 브랜드로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했다.
8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국내 SPA 시장의 첫 타자는 2001년 등장한 스페인 SPA 망고였지만 본격적인 시장 개화는 2005년부터다. 당시 사업을 시작한 유니클로에 이어 2008년 스페인 자라, 2010년 스웨덴 H&M 등 세계 3대 SPA 브랜드가 등장했다.
SPA 시장 1위 유니클로는 올해도 독보적인 실적을 냈다.
8월 결산법인인 에프알엘코리아의 2013회계연도(지난해 9월부터 올 8월) 매출은 8954억 원으로 전년보다 29.06% 증가했다. 당초 목표였던 연매출 1조 달성은 실패했지만 국내 1위 매출 브랜드로 이름을 올렸다.
H&M, 자라 등 해외 SPA 3사는 최근 3년간 두자릿수 매출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다.
반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국내 브랜드들은 시장을 고스란히 뺏겼다. 특히 SPA와 시장이 겹치는 캐주얼, 여성복 브랜드는 직격탄을 맞았다.
대기업 계열 브랜드들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국패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42개 브랜드가 영업을 중단하거나 부도를 냈다. 불경기 속 SPA와 겨루는 과정에서 가격 경쟁력과 디자인에서 앞서지 못하면서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다.
이랜드는 지난 7월 여성복 계열사 데코네티션을 매각했다. 중가 여성복 브랜드 데코, EnC, 96NY, ANACAPRI, DIA 등의 국내 사업을 포기했다. 지난해 이랜드는 캐주얼 브랜드 쉐인진, 콕스와 여성복 브랜드 테레지아 등을 접었다.
LF(옛 LG패션)는 올해 SPA형 브랜드 TWGT의 여성복 버전인 TWGTW를 접기로 했다. 고급 여성 브랜드인 모그의 경우 유통채널을 변경, 백화점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제일모직의 경우 캐주얼브랜드 후부를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네 차례에 결쳐 콘셉트를 바꾸며 회생에 힘썼지만 결국 사업을 접었다. 여성복의 데레쿠니, 에피타프도 접었다. 지난해 여성복 브랜드 칼리아(기업명 시선그룹), CMT(형지), 쿠아(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 등도 사라졌다.
한국산업연구원은 "SPA, 해외 직접구매 등으로 유통망이 리테일형으로 변화하면서 가장 직격탄을 받은 업종이 여성복" 이라며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한섬(대표브랜드 타임), 형지(크로커다일레이디), 신세계인터내셔날(보브)의 3개년 연평균 매출성장률이 떨어졌다"고 밝혔다.
여성복뿐만 아니라 남성복도 한파를 피하지 못했다. 동일레나운, 평안엘앤씨 등 기존 남성어덜트캐주얼 시장의 소비자가 SPA로 이동한 탓이다.
SPA 브랜드들이 추가로 라인을 확장하면서 유아복과 침구업계도 타격을 입고 있다.
국내 패션기업들도 미쏘·스파오(이랜드), 에잇세컨즈(제일모직) 등의 SPA 브랜드를 선보이며 따라잡기에 나섰지만 갈길이 멀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유니클로 등 해외 SPA는 상대적으로 백화점과 몰 매장 입점 시 훨씬 적은 수수료를 적용 받아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며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한 상품 자체의 경쟁력 탓도 있지만 유통채널 우대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한경닷컴 오정민 기자 bloom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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